

국내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을 둘러싸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8월 1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엔비디아向 HBM3E 12단 제품의 최종 품질 인증을 아직 통과하지 못한 상태이며, 이 때문에 엔비디아가 올해 필요한 HBM 물량의 상당 부분을 SK하이닉스에 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장조사업체 집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2025년 2분기 기준 세계 HBM 시장에서 62%의 점유율로 1위를 지키고 있으며, 마이크론이 21%, 삼성전자가 17%로 뒤를 잇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부터 엔비디아의 품질 검증을 통과하기 위해 수차례 재도전을 거듭해왔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설령 하반기 중 인증을 마치더라도 이미 엔비디아의 연간 조달 계획이 대부분 확정된 상태여서 올해 매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向 HBM 공급을 사실상 주도하며 AI 반도체 호황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고성능 메모리로, 엔비디아의 AI 가속기(GPU)와 결합돼 생성형 AI 서비스 구동에 필수적인 부품으로 꼽힌다. 두 회사의 경쟁은 결국 어느 기업이 엔비디아라는 최대 고객사의 신뢰를 먼저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삼성전자, 2나노 공정으로 반격 준비
삼성전자는 HBM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차세대 파운드리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회사는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구조를 적용한 2나노 공정으로 차기 모바일 프로세서 엑시노스 2600을 개발 중이며, 이 제품은 삼성전자 자체 갤럭시S26 시리즈에 탑재돼 2026년 초 출시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 7월 25일 출시된 갤럭시Z 플립7에 3나노 공정 기반의 엑시노스 2500을 탑재하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시장에서의 존재감 회복을 시도했다. 또 지난 7월 28일에는 테슬라와 총 165억 4,400만 달러(약 22조7,600억원) 규모의 파운드리 위탁생산 계약을 공시했다. 2033년 말까지 이어지는 이번 계약에 따라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테일러 공장에서 2나노 공정으로 테슬라의 차세대 AI 칩을 생산하게 되며, 이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의 단일 계약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HBM에서의 부진을 시스템반도체·파운드리 부문의 대형 수주로 상쇄하려는 전략을 펴고 있다고 분석한다.
SK하이닉스, CIS 접고 AI 메모리로 전환
SK하이닉스는 지난 3월 6일 사내 소통행사에서 이미지센서(CIS) 사업부문을 AI 메모리 분야로 통합하겠다고 발표했다. 회사는 당시 “AI 시대가 도래하며 회사는 AI 메모리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뒀고, 핵심 AI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대전환기를 보내고 있다”며 “CIS 사업 부문이 보유한 기술과 경험이 글로벌 AI 기업으로 입지를 굳건히 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기존 CIS 인력은 HBM 등 AI 메모리 사업 부문으로 순차 재배치되며, 2007년 말 출범한 SK하이닉스의 CIS 사업은 17년여 만에 사실상 정리 수순을 밟게 됐다.
한편 대중국 사업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비교적 양호한 실적을 유지하고 있다. 양사의 중국 반도체 판매·생산 자회사는 지난해 메모리 반도체 시장 호황에 힘입어 실적이 개선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여전히 대만 TSMC와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놓고 있어,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 양쪽에서의 종합적인 경쟁력 강화가 과제로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HBM3E 인증 여부와 엑시노스 2600의 시장 안착, SK하이닉스의 HBM4 양산 일정 등이 하반기 이후 두 회사의 실적을 가를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양사 모두 2026년부터 본격화될 HBM4 공급 경쟁을 앞두고 있어,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고객사의 물량 배정 결과에 따라 국내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판도가 다시 한번 요동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