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의 포장재 및 포장폐기물 규제(PPWR, 정식 명칭 Regulation (EU) 2025/40)가 2025년 2월 11일 발효돼 2026년 8월 12일부터 27개 회원국에 전면 적용될 예정인 가운데, 소각 중심의 폐기물 처리 정책과 재활용·재사용을 우선시하는 순환경제 정책 사이의 논쟁이 한국에서도 다시 불거지고 있다. 매립지 부족과 님비 현상으로 소각장 확대가 현실적 대안으로 거론되는 동시에, 유럽에서는 최신 시설조차 환경단체의 감시 대상이 되고 있어 정책 방향을 둘러싼 고민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EU 포장재 규제, 소각 대신 재활용·재사용 우선
PPWR은 기존의 포장재 및 포장폐기물 지침(94/62/EC)을 대체하는 규정으로, 2030년까지 모든 포장재를 재활용 가능하도록 의무화하고 2018년 대비 포장폐기물 배출량을 2030년 5퍼센트, 2035년 10퍼센트, 2040년 15퍼센트 감축하도록 회원국에 요구한다. 단순 소각 처리 대신 재활용과 재사용을 우선시하는 순환경제 모델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규정의 핵심 목표다. 2029년까지 일회용 플라스틱 병과 금속 음료용기의 90퍼센트 이상을 회수하는 보증금반환제도 도입도 회원국에 의무화됐다.
최신 소각장도 못 피한 환경단체 감시
그럼에도 유럽에서 소각장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네덜란드 북부 하를링언에 위치한 소각장 REC(Reststoffen Energie Centrale)는 2011년 가동을 시작할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앞선 시설로 소개됐다. 그러나 환경 감시단체 ToxicoWatch가 2013년 소각장 인근 주택가에서 기른 닭이 낳은 달걀을 분석한 결과 다이옥신과 퓨란 농도가 허용 기준치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 조사 결과는 네덜란드 국립보건환경연구원(RIVM)의 검증을 거쳤다. 이후 국제환경단체 제로웨이스트유럽이 2019년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이 시설의 배출 문제가 다시 지적됐다. 최신 기술을 적용한 시설이라도 장기적인 오염물질 배출을 완전히 차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감시단체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국, 매립지 부족과 님비 현상 속 소각장 확대론
한국은 급속한 도시화와 인구 밀집으로 폐기물 처리가 현실적 과제로 떠오른 상태다. 매립지 확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새로운 소각장 건설 역시 님비 현상에 부딪히면서, 기존 소각장의 효율을 높이는 방안이 단기적 대안으로 거론된다. 소각장 확대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에너지 회수 설비를 갖춘 소각장이 폐기물을 처리하는 동시에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권의 폐기물 처리량이 꾸준히 늘고 있는 현실도 소각장 확대론에 힘을 싣는 요인으로 꼽힌다.
폐기물 발생량 자체를 줄이는 정책 실험도 진행 중
반면 환경단체와 일부 전문가들은 소각장 확충이 폐기물 감량 유인을 오히려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처리 용량을 늘리면 감량 정책의 긴급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유럽처럼 포장재 사용 제한, 일회용품 규제,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 강화 등을 통해 폐기물 발생 자체를 줄이는 접근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일부 지자체를 중심으로 플라스틱 컵 보증금제, 배달음식 다회용기 회수 시스템 등의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런 정책이 자리를 잡으면 소각 의존도를 낮출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기술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문제
전문가들은 소각장 확대와 감량 중심 정책 사이의 선택이 단순한 기술적 판단을 넘어선 문제라고 지적한다. 유럽에서 PPWR과 같은 강력한 규제가 도입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단기적 비용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순환경제로 전환하겠다는 회원국들의 정치적 합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정책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선택하기보다 지역별 여건에 맞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신중론도 함께 제기된다.
한국은 소각장 확충이라는 단기적 해법과 순환경제 전환이라는 장기적 과제 사이에서 정책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 놓여 있다. 유럽의 PPWR이 2026년 8월 전면 시행된 이후 실제로 어떤 성과를 내는지가 한국의 정책 설계에도 참고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환경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소각장 확충 계획과 폐기물 감량 정책을 어떻게 병행해 나갈지, 그 구체적인 로드맵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