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에서 퇴계의 제자로
류성룡(柳成龍)은 조선(1392~1897)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의학자·저술가로, 1542년 11월 7일인 음력 10월 1일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 서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안동 김씨인 어머니의 친정이 있던 외가였다. 본관은 풍산,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며, 훗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사복시정 류소의 4대손이자 류자온의 증손이며, 간성군수를 지낸 류공작의 손자였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이고, 류성룡은 두 아들 가운데 차남이었다. 친형은 류운룡이다.
그는 세 살 때 이미 《대학》을 읽어 신동으로 평가받았다. 열일곱 살에는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 갔다가 심통원이 그곳에 두고 간 《양명집》을 구해 읽었다. 처음에는 양명학에 관심을 보였지만, 스승 이황이 이를 사학이자 유학 전통에 해를 끼치는 이단으로 규정하자 관심을 거두고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다만 양명의 학설 가운데 장점이라고 판단한 부분까지 모두 버리지는 않았다. 스물한 살에는 종숙 류중엄, 형 류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훗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조목·김성일도 같은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이었다.
류성룡은 성리학에 정통했으나 학문의 범위를 한 분야에 가두지 않았다. 예악을 통해 사회를 교화하는 문제부터 군사를 다스리고 재정을 운영하는 일까지 폭넓게 연구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학문적 기반은 전쟁과 붕당 갈등이 겹친 시대에 국정과 군무를 함께 다루는 재상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동시에 학문적 원칙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 내린 그의 선택들은 훗날 공적뿐 아니라 과오까지 기록하게 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관료의 길과 붕당의 한가운데
류성룡은 1564년 명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고,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에 들어간 뒤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했으며, 1569년 선조 2년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나라 지식인들은 그를 ‘서애 선생’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이조 정랑이 된 뒤에는 이준경의 관직을 삭탈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인성 대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예조가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설을 제시하자, 그는 적손의 예에 따라 3년설이 타당하다고 주장했고 그 의견이 시행되었다.
1575년 을해당론을 계기로 조정의 관리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을 때 류성룡은 동인에 참여했다. 심의겸이 김효원의 이조전랑 천거를 반대하자, 같은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심의겸을 변호하지 않고 김효원을 지지했다. 이후 응교, 경연 검토관, 직제학, 부제학, 도승지, 1582년부터 1583년까지 대사헌, 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거치며 승진했다. 상주 목사로 부임해서는 예절을 바탕으로 고을을 다스렸다.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돌보던 중 함경도 관찰사와 성균관 대사성 등에 잇달아 임명됐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의주 목사 서익이 그를 간신이라고 탄핵하자 류성룡은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머물렀다. 뒤에 형조 판서로 다시 불려와 대제학을 겸했으며, 1590년에는 예조 판서가 되었다.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로 역옥이 벌어졌을 때 정여립의 여러 글에 그의 이름이 나타났지만 선조의 신임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암수 등 50여 명이 이산해·류성룡·나사침·나덕준·정인홍·정개청을 정여립과 한몸 같은 사이라고 지목하며 물러나게 해 달라고 상소하자, 선조는 오히려 류성룡과 이산해를 만나 위로하고 정암수 이하 10여 명에게 죄를 주라고 명했다.
온건한 남인과 전쟁 전의 선택
기축옥사를 주도한 서인 정철의 처벌 문제는 동인을 다시 갈라놓았다. 이산해와 정인홍 등은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류성룡과 우성전은 정승을 지낸 고관을 죽이는 것은 지나치다며 유배와 선처를 주장했다. 강경파는 기축옥사와 정여립 사건에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겠느냐고 반박했다. 결국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가 북인, 죽이지 말고 유배하자는 온건파가 남인을 형성했다. 좌의정과 이조 판서를 겸하던 류성룡은 이산해·정인홍과 결별하고 남인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는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좌의정 재직 중 일본이 자국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내오자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다. 그러나 류성룡은 반드시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의견대로 보고가 이루어졌다. 이 조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명나라가 일본과 조선이 공모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일을 차단하는 데 일조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외교 문서 하나가 동맹국의 신뢰와 직결될 수 있음을 판단한 선택이었다.
1591년 선조가 장수를 천거하라고 하자 류성룡은 권율·이순신·신충원 등을 추천했다. 이순신은 전라도에, 원균은 경상도에 배치되었다. 류성룡은 이순신과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가까운 사이였고,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도 죽마지우였다. 그의 천거에는 이순신의 능력을 관찰한 판단보다 이요신과의 오랜 친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서술되지만,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어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바꾸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후견인 역할을 한 인물로도 기억된다.
임진왜란과 조정을 짊어진 재상
전쟁 전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조정은 서인 황윤길을 정사,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삼아 1591년 2월 통신사를 파견했다. 이들은 1592년 2월 돌아왔고, 3월 황윤길은 일본이 곧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럴 염려가 없다고 주장했다. 동인인 서장관 허성도 황윤길의 견해에 동조했지만, 당시 좌의정 류성룡은 같은 동인 김성일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침입 우려가 없다는 쪽으로 논의가 끝나 대비가 중단됐다. 이는 류성룡의 생애에서 전쟁 극복의 공과 함께 반드시 살펴야 할 중대한 판단의 한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란하던 중, 몽진을 주도한 책임으로 이산해가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류성룡이 후임으로 거론됐다. 그러나 신잡이 김성일의 보고에 동조해 방비를 멈추게 한 책임을 제기하면서 그는 그날 좌의정에서도 물러나 벼슬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피란길에서 패전한 장수 이일을 만났을 때 이일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짚신만 신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류성룡은 선조가 그 모습을 보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철릭을 가져오게 해 입혔고, 이일은 그렇게 왕의 피란 행렬에 합류했다.
류성룡은 다시 기용되어 관서 도체찰사로 안주에 머물며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묻고 군량을 준비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서는 평양 지도를 건네 전투 수행에 편의를 제공했다. 임진왜란 동안에는 4도 도제찰사와 영의정으로 조선 조정의 국정과 군무를 총괄하고, 인재 등용과 여러 개혁 정치를 통해 전쟁 피해를 수습하려 했다. 이 때문에 무너진 나라의 산하를 다시 일으켰다는 뜻의 ‘재조산하를 이룬 재상’으로 평가받았으며, 조선의 5대 명재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1597년 이순신이 역모 혐의를 받아 처벌될 때 류성룡의 태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기록이 남아 있다. 《징비록》에서 그는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했기 때문에 반대자들의 공격을 받았고, 선조 앞에서 직접 변호했으나 경기 지역 순찰을 다녀온 사이 이순신이 죄인이 되었다고 썼다. 또한 2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 10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다고 기록했다. 반면 《선조실록》은 그가 이순신을 천거한 일을 사람을 잘못 본 탓이라고 말하며 탄핵에 동조했다고 전한다. 당시 이원익과 정탁이 이순신을 옹호해 참수형을 면하게 했고, 백의종군한 이순신은 복직한 뒤 정유재란의 명량해전에서 다시 조선을 구하는 활약을 했다.
징비록에 남긴 후회와 역사적 유산
영의정으로 복귀한 류성룡은 1598년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을 맞았다.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았고, 노량해전과 같은 날 관직을 삭탈당했다. 그는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 은거했으며, 1600년 복권된 뒤 조정이 여러 차례 불렀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 무렵 친형과 어머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고, 아들과 큰조카, 제자이자 조카사위인 김홍미까지 잃는 여러 우환을 겪었다.
류성룡은 전쟁에서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 집필에 몰두했다. 제목에는 지난 잘못을 경계해 앞으로 닥칠 근심을 삼간다는 문제의식이 담겼으며, 이 책은 대한민국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일본 문학에도 영향을 끼친 저술로 평가된다. 그 밖에 문집인 《서애집》을 비롯해 《난후잡록》, 《진사록》, 《근폭집》을 남겼고, 의학자로서 침구에 관한 《침경요결》도 저술했다. 전쟁을 지휘한 재상이 자신의 경험을 공적의 기록에만 머물지 않고 반성과 경계의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그의 삶을 대표하는 저작이 되었다.
1604년 류성룡은 호성공신에 책록되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도 녹훈되었으며, 1605년에는 청난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07년 5월 31일인 음력 5월 6일, 66세이자 만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호성공신 2등과 풍원부원군에 책록되었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당은 병산서원 뒤에 세워졌으며 여산의 퇴계묘에 함께 모셔졌다. 호계서원·병산서원·남계서원·삼강서원·도남서원·빙계서원 등에도 위패가 모셔져 제향되었다.
평가가 찬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북인 성향 편찬자의 평이 실린 《선조실록》은 그가 재상으로서 그릇이 작고 붕당심을 버리지 못했으며,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고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주관 없이 당시의 대세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는 평가도 남겼다. 다만 《선조실록》은 훗날 효종 때 《선조수정실록》으로 다시 쓰였고, 수정실록 역시 류성룡의 반대파인 서인이 편찬해 완전히 공평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반대로 그가 정계를 떠난 지 8개월 뒤인 1599년 7월 선조는 류성룡이 떠난 뒤 국사가 날로 엉성하고 해이해진다며 복관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류성룡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까닭은 완전무결해서가 아니라, 전쟁 전 판단의 실패와 전쟁 중 국정 운영의 공적을 함께 남기고 그 후회와 교훈을 《징비록》에 기록했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하게 살았던 청백리이자 위기의 조선을 떠받친 재상이라는 평가는, 실패를 숨기지 않고 다음 시대의 경계로 바꾼 그의 유산과 함께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