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헤이그 특사로 대한제국의 목소리를 국제사회에 알리다

이준, 헤이그 특사로 대한제국의 목소리를 국제사회에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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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에서 태어나 법관양성소 1회로 졸업하다

이준(李儁, 1859년 음력 12월 18일~1907년 7월 14일)은 대한제국의 관리이자 외교관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순칠(舜七), 아호는 일성(一醒)과 해사(海士)다.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에서 부친 이병관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추존 군주 환조의 아들인 완풍대군의 18대손이다.

어려서 한학을 익혔고, 성장한 뒤에는 고향 북청에 학원을 세워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 이후 상경해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유했다. 함흥에서 종9품 참봉직에 있다가 189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36세에 제1회로 졸업했다.

검사 임명 33일 만에 면관된 강직함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가 됐다. 황족 이재규가 친일 내각과 협잡해 논밭 문서를 위조하고 백성의 토지를 강탈하자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또 은사령 작성이 국법상 검사 고유 권한이었는데도 법부가 은사 대상자 명단을 미리 정해놓고 그대로 작성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상관인 형사국장 김낙헌을 고소했다.

법부는 부하가 상관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이준을 체포했다. 그러나 애국계몽단체 회원들과 백성들이 석방을 요구해 사흘 만에 풀려났다. 이준은 석방 직후 법무대신과 평리원 재판장 이하 관리 전원의 면직과 처벌을 청원했고, 결국 법률가로 임명된 지 33일 만에 면관됐다.

훗날 평리원 검사로 복귀한 뒤에도 강직함은 이어졌다. 검사 5년차에는 법무대신 이하영을 탄핵했다.

독립협회에서 국민교육회까지, 계몽운동의 한복판

1895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담해 활동했다. 갑오경장 시기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귀국한 뒤에는 독립협회와 상동교회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당시 상동교회는 전덕기 전도사를 중심으로 개화파 청년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전덕기의 부탁을 받은 국어학자 주시경이 상동교회가 세운 학교에서 우리말 문법을 가르칠 만큼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들의 공동체였다.

1902년에는 민영환의 비밀결사 개혁당에 가담했고, 1904년 공진회 회장을 지냈다. 공진회 활동으로 1905년 황해도 황주 철도(鐵島)에 유배됐다가 이듬해 6월 징계가 풀렸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국민교육회 회장에 취임해 보광학교와 오성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계몽 운동에 힘썼다.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헤이그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동교회의 전덕기와 이동휘, 이회영 등이 고종 황제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고, 세 사람은 고종의 신임장을 받았다.

이준은 그해 5월 21일 고종 황제의 밀사 자격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출항했다. 신임장을 들고 만주 용정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해 헤이그로 향했다.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이 방해했고, 이미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세 특사는 평화회의 본회의 참석 자체를 봉쇄당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했다.

헤이그의 숙소에서 순국, 그리고 남은 기록

이준은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의 숙소에서 병으로 순국했다. 49세였다.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 화데란트》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특사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며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 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사망하였다”고 보도했다.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일제의 억압에 맞선 반일 분위기 속에서 그가 영웅화되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 문교부장관의 요청에 따른 조사 끝에 국사편찬위원회는 1962년 할복 자결이 아닌 쪽으로 판단했다. 자결이 아닌 병사였다는 사실이 그의 민족의식을 바래게 하지는 않는다.

이준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유해는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돼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서울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과 이준열사기념교회가 건립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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