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논쟁을 넘어 드러난 허준의 출발
허준(許浚, 1539~1615)은 조선(1392~1897) 중기에 활동한 의관이자 의학자다.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천이다. 오늘날에는 1539년 출생으로 통상 서술되지만, 한때는 1543년 또는 1546년 출생설이 널리 알려졌고 1990년대에 나온 한국의 인물사전들도 두 설 가운데 하나를 따랐다. 출생 연대를 둘러싼 논의가 달라진 계기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 최립이 남긴 문집 《간이집》이었다. 여기에 실린 글의 제목은 《증송동경 대의 허양평군 환조자의주》로, 뜻을 풀면 ‘내 동갑내기 친구인 태의 양평군 허준이 의주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는 데 부쳐’라는 의미다. 최립이 허준을 자신과 동갑이라고 밝힌 기록과 《태평회맹도》의 기해년 출생 기록이 확인되면서 2000년 이후에는 1539년생이라는 설명이 일반화되었다.
다만 출생 연도에 관한 기록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허준박물관에 보관된 1605년의 내의원 명부 《내의선생안》과 《태의원선생안》에는 그의 출생 연도가 1537년 정유년으로 적혀 있다. 《내의선생안》은 허준이 직접 서문을 쓰고 아버지 허론, 할아버지 허곤, 증조부 허지의 직계를 수록한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같은 명부가 허준의 향년을 77세라고 기록한 사실은 1537년생이라는 표기와 맞지 않는다. 1537년에 태어나 1615년에 세상을 떠났다면 나이는 79세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허준의 생애는 유명한 인물에게 흔히 덧붙는 전설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헌을 대조하며 사실을 찾아가는 역사 연구의 과정과도 맞닿아 있다.
생애 자료에는 허준이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풍군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는 평안도 용천과 경기도 양천·파주를 거쳐 연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것으로 전한다.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는 한국전쟁 뒤 휴전선 북쪽의 장풍군에 편입되었다. 한편 여러 기록에는 허준이 ‘양천인’이라고 적혀 있고, 선조에게 양평군이라는 관작을 받은 사실도 전한다. 그의 집안은 양천 허씨 시조 허선문의 20세손이었으며, 할아버지 허곤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허론은 용천부사를 지냈다. 생모는 영광 김씨, 부인은 정경부인 안동 김씨였으며 아들 허겸과 동복아우 허징이 있었다.
시험 기록보다 의술로 증명한 궁중 의관
허준이 궁중 의료기관인 내의원에 들어간 과정은 후대의 드라마와 구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간 전승과 소설·드라마에서는 그가 의과에 급제했으며 1574년 합격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실제 의과 급제자 명단인 방목에는 허준의 이름이 없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569년 이조판서 홍담과 미암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궁중 의사인 의관으로 출사했다. 시험 합격 기록이 아니라 천거와 실제 치료 능력을 통해 왕실 의료의 현장에 들어선 셈이다.
1570년 6월, 31세였던 허준은 부제학 유희춘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한성부로 갔고 병을 고쳤다. 유희춘이 그를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해 음력 6월 3일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소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허준은 이어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했고, 이 일을 계기로 조선의 수도 한성부에서 고관들에게 이름을 알리며 명성을 높였다. 1572년에는 종4품 내의원첨정으로 재직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고, 이듬해인 1573년에는 정3품 통훈대부와 내의원정에 올랐다. 의과 응시 기록이 없는데도 동료 의관들보다 빠르게 높은 지위에 오른 사실은 그의 의술이 궁중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1578년 9월 내의원첨정이던 허준은 새로 출판된 침구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을 임금에게 하사받았다. 같은 해 갑자기 심신이 허약해졌던 선조의 건강이 회복되자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포상을 받았고, 허준도 태의 양예수·안덕수 등과 함께 사슴가죽 한 장을 받았다. 이후에는 구안와사로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해 완쾌시켰다. 왕실과 그 주변의 환자를 치료하며 쌓은 경험은 허준을 내의원의 중심 인물로 끌어올렸다.
1590년에는 인빈 김씨의 아들인 왕자 신성군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 곧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지위로 승진했다. 그러나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삼사와 의금부는 왕자를 치료하는 것은 의관의 당연한 직무이며, 공이 있더라도 의관에게 당상의 품계를 줄 수 없다며 여러 차례 취소를 요구했다. 선조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허준의 승진을 둘러싼 충돌은 그의 치료 성과가 왕에게 얼마나 크게 인정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조선의 전문직 의관이 높은 관품으로 올라갈 때 맞닥뜨려야 했던 강한 제도적 반발도 드러낸다.
전쟁 속 어가를 지키고 의학 편찬을 맡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조선의 수도를 떠나 의주까지 피신했다. 허준은 임금을 호종하며 건강을 돌봤고, 이 공로로 훗날 공신의 대열에 들었다. 1595년 선조가 별전편방에서 침 치료를 받을 때에도 내의원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과 함께 의료진이 참여했다. 전쟁 중 왕을 수행한 일은 단순히 한 차례의 진료가 아니라, 국가적 위기 속에서 왕실 의료를 계속 책임졌다는 의미를 지녔다.
1596년에는 왕세자 광해군의 병을 맡아 치료한 공으로 정2품 하계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김응탁과 정예남도 승급했다. 허준은 이어 정2품 상계 정헌대부와 중추부의 정2품 관직인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삼사의 간관들은 이번에도 의관들의 승진을 취소하라고 요구했지만, 선조는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0년에는 정2품 지중추부사를 겸직하던 내의원 최고 서열의 수의 양예수가 세상을 떠나자,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서 수의가 되었다.
전쟁 이후 선조는 흩어진 의학 지식을 복원하고 정리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1596년 이후 허준은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해 새로운 의서를 편찬하고 핵심 내용을 정리했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지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 선조는 허준을 다시 불러 혼자 책임지고 의서를 만들도록 명했고, 궁중이 보유한 내장방서 500권을 참고 자료로 내주었다. 전쟁으로 기존의 편찬 조직이 무너진 뒤에도 한 사람에게 방대한 의학 정리 사업을 맡겼다는 사실은 허준에게 쌓인 신뢰와 책임의 크기를 함께 보여준다.
유배지에서도 멈추지 않은 《동의보감》
허준의 관직은 1604년 임진왜란 때 어가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면서 다시 높아졌다. 그는 의관으로서는 처음 정1품 양평부원군에 올랐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종1품 양평군으로 낮아졌다. 이후 종1품 상계 숭록대부에 올랐고, 1606년에는 왕실의 병을 다스린 공으로 정1품 하계 보국숭록대부에 가자되었다. 하지만 보국숭록대부는 당상관 문관이 받는 위계라는 반대가 다시 제기되어 임명이 백지화되었다. 1607년 선조의 병이 위중하고 좀처럼 낫지 않자 허준이 약을 잘못 썼다며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이어졌지만, 선조는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이를 무마했다.
1608년 음력 2월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바뀌었다. 허준은 임금의 죽음에 대한 책임 추궁을 받은 끝에 3월 17일 파직되고 공암으로 문외출송되었다. 문외출송은 죄인을 한성부 사대문 밖 지방으로 내보내는 유배의 한 형태였다. 새 임금 광해군은 허준을 이른 시일 안에 복귀시키려 했지만 삼사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왕을 오랫동안 치료하며 높은 품계까지 받았던 의관은 왕의 죽음과 함께 가장 무거운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허준은 유배 중에도 1596년부터 왕명으로 진행해 온 의서 편찬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 《동의보감》을 약 15년에 걸쳐 편술했고, 광해군이 1609년 11월 22일 석방 명령을 내릴 때까지 집필을 계속했다. 1610년에 완성된 《동의보감》은 허준 개인의 명성을 대표하는 책인 동시에, 전쟁으로 흩어진 의학 자료를 다시 모아 체계화하라는 국가적 과업의 결과였다. 궁중의 방대한 장서와 여러 의관이 시작한 편찬 작업을 바탕으로 하되, 전쟁 이후에는 허준이 홀로 책임을 이어받아 완성했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허준의 저술은 《동의보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선조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이 끝난 뒤 여러 중국 의서와 기존 의서를 복원하고 편찬하며 정리하는 데 힘썼다. 한글로 풀이한 두창 의서 《언해두창집요》, 산부인과 관련 의서 《언해태산집요》, 가정에서 기본적인 구급 지식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언해구급방》도 집필했다. 이 책들은 허준의 관심이 왕실 진료에만 머물지 않고 두창, 출산, 응급 처치와 같은 구체적인 의료 영역과 한글 의서 편찬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조선을 넘어 이어진 의학자의 이름
허준은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뒤 음력 11월 22일, 양력 1611년 1월 5일에 귀양에서 풀려나 신원되고 내의원에 복직했다. 이후에는 후진을 양성하고 의서를 편찬하거나 손질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1615년 음력 8월 17일, 양력 10월 9일에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1월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 하계 보국숭록대부와 양평부원군의 관작을 추증했다. 살아 있을 때 신분과 관직 관행을 이유로 거듭 제동이 걸렸던 최고의 품계가 사후에야 공식적으로 주어진 셈이다.
선조는 허준을 두고 “제서에 널리 통달하여 약을 쓰는 데에 노련하다”고 평가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은 허준이 저미고라는 약으로 많은 사람의 두창을 고쳤다고 기록하고, 양예수·허준·박제가·손사명·안덕수 등을 당대에 이름난 의원으로 들었다.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허준을 한국에 나타난 편작과 창공이라는 뜻의 “한국행림 편창”이라 불렀고, 중국에서는 “천하의 보물을 만든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오늘날에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출판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의학 정리가 조선 안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후대의 대중문화가 만든 이야기와 실제 기록은 구별되어야 한다. 허준이 유의태에게 의술을 배웠다는 설정은 실존 인물 유이태를 각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이태는 산청군 생초면 출신으로 《마진편》·《인서문견록》·《실험단방》 등을 쓴 조선 후기의 의관이며, 허준보다 약 100년 뒤에 활동했으므로 그의 스승일 수 없다. 허준의 출신 신분을 두고도 족보와 여러 기록에 따른 논쟁이 이어져 왔다. 양천 허씨 족보는 그를 서자로 기록하며, 동복아우 허징의 과거 기록과 혼인 관계 역시 논의의 근거로 제시되어 왔다. 이러한 논쟁은 전설적 영웅상을 덧붙이기보다 남은 문헌으로 허준의 삶을 정확히 복원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허준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의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부인 안동 김씨와 생모의 묘소와 함께 자리한다. 한국전쟁 이후 방치되었다가 1991년 9월 27일 군사 협조 아래 이양재의 조사로 다시 발견되었고, 이후 정비되어 1992년 6월 5일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 《허준묘》로 지정되었다. 2006년 5월에는 군사안보 관광 구역으로 공개되었으며,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는 그의 호를 딴 구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허준이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이유는 높은 관직에 올랐기 때문만이 아니다. 전쟁과 유배, 정치적 책임 추궁 속에서도 의학 자료를 복원하고 정리하여 《동의보감》을 완성하고, 한글 의서를 통해 의료 지식의 활용 범위를 넓힌 학문적 성취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