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세종대왕, 훈민정음으로 백성의 글을 열다…한국사 인물

[인물] 세종대왕, 훈민정음으로 백성의 글을 열다…한국사 인물

기사 이해를 돕기위한 이미지

책을 놓지 않았던 왕자, 왕위에 오르다

세종은 1397년 5월 15일, 음력으로는 4월 10일 한성 준수방, 오늘날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어났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자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과 민씨, 훗날 원경왕후의 여섯째 자녀이며 셋째 아들이었다. 위로는 양녕대군 이제와 효령대군 이보, 정순공주·경정공주·경안공주가 있었다. 아명은 막동, 이름은 도였다. 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고, 같은 해 훗날 소헌왕후가 되는 심온의 딸 심씨와 혼인했다.

충녕군은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했다.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와 변계량에게 배웠고, 뒤에는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던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책을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칠 정도였으며, 이를 걱정한 태종이 책을 모두 감추게 한 일도 있었다. 1412년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이 된 그는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이자 형제간 우애가 깊은 인물로 각인되었다. 홍역을 앓은 친동생 성녕대군을 직접 간호했지만, 성녕대군은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왕실의 후계 문제에서는 세자 양녕대군과 긴장이 드러났다. 양녕대군이 옷을 갖춰 입고 자신의 모습이 어떠냐고 묻자 충녕대군은 먼저 마음을 바로잡은 뒤 용모를 닦으라고 말했다. 상왕 정종의 연회 뒤 양녕대군이 매형 이백강의 첩 칠점생을 데려가려 했을 때에도 이를 지적했으며, 조모 신의왕후의 기일에 흥덕사에서 향을 피운 뒤 아랫사람들과 바둑을 두며 논 일도 비판했다. 양녕대군이 기생 어리를 여러 차례 궁에 몰래 들였다가 태종에게 꾸지람을 받자 충녕대군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불손하게 대응하는 형을 그때마다 타일렀다.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양녕대군의 여러 비행과 신료들의 잇따른 폐세자 주청을 받아들여 그를 폐위하고 광주로 추방한 뒤 충녕대군을 새 세자로 책봉했다.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이 양위하자 세자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거듭된 양위를 받아들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했다. 조선 제4대 국왕 세종의 재위는 1418년 9월 9일부터 1450년 3월 30일까지 이어졌다. 초기에는 상왕 태종이 군권과 인사권을 행사했고 세종의 장인 심온을 비롯한 외척 세력도 숙청되었지만, 세종은 점차 인재를 폭넓게 등용하며 자신의 통치 체제를 세워 나갔다.

인재의 능력을 나누어 국정을 움직이다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치려 했다. 대신들에게 정무를 맡기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직접 처리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했다. 국가 행사는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했고, 사대부에게 주자가례 시행을 장려해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도록 했다. 4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와 《효행록》을 간행한 것도 이러한 방향과 연결된다.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고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등의 공법을 제정해 조세 제도를 확립한 일도 중요한 성과였다.

세종은 황희·맹사성·윤회·김종서 같은 재상을 등용해 능력에 맞는 임무를 나누었다. 황희에게는 인사·행정·군사처럼 과단성이 필요한 일을,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처럼 유연성과 섬세함이 필요한 일을 맡겼다. 윤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 외교 활동과 외교 문서 작성, 집현전 관련 업무를 담당했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가 나누어 맡았다.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른 뒤에는 국방 업무를 보좌하게 했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한 학자형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러운 예술가형 인물이었고, 윤회도 예술가적 특성을 지닌 인재였다.

이러한 국정 분담은 의정부서사제로 나타났다. 6조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을 제외한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보고하도록 한 제도였다. 표면적인 시행 이유는 세종의 건강이었지만, 오랫동안 관직에 몸담은 영의정 황희에 대한 신뢰도 중요한 배경이었다. 황희는 이후 18년 동안 세종을 보필했다. 세종은 청렴하지만 자신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맹사성도 황희·권진과 함께 중용했고, 후반기에는 황희 등이 천거한 김종서를 재상으로 삼았다. 다만 권력 남용을 경계해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지 않고 업무를 분장하거나 공유하게 했다.

백성의 말을 글로 옮긴 훈민정음

세종 정치의 중심에는 지식이 실제 통치와 백성의 생활에 쓰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1420년, 재위 2년에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한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소속 학자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했다. 한편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 백성에게 보급했지만, 글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당시 사용하던 한자는 배우기 어려웠고 한국어와도 서로 잘 통하지 않아, 백성이 말하고 싶은 바를 문자로 표현하는 데 큰 장벽이 있었다.

세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43년, 재위 25년에 친히 스물여덟 글자를 창제했다. 모음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고 자음은 오행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았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으면서도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를 만들려 한 결과가 훈민정음이었다. 이는 지식을 소수의 전유물로 두지 않고, 백성이 자신의 말을 직접 기록하고 필요한 정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통치의 결실로 평가받는다.

훈민정음은 1446년 9월 29일 반포되었으며 예조판서 정인지가 서문을 작성했다. 이후 언문이라고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었다. 20세기에 주시경이 한글로 발전시켰고, 오늘날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식 문자로 널리 쓰인다. 조선의 한 왕이 백성이 문자를 몰라 농사책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출발해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세종의 여러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현대인의 일상과 이어지는 유산이다.

하늘과 시간을 관측하고 생활을 바꾸다

세종은 과학 기술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할 분야로 보았다. 정인지·정초·이천·장영실 등에게 명해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와 혼천의, 혼상을 만들게 했고, 천문 기구이자 시계인 일성정시의도 제작하게 했다. 해시계 앙부일구와 물시계 자격루, 누호 역시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측우기의 발명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기구들은 천문 현상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 측정과 농업 등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궁중에는 일종의 과학관에 해당하는 흠경각을 세우고 여러 과학 기구를 설치했다.

과학 인재를 대하는 방식도 주목된다. 세종은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과 최해산 같은 학자를 후원했다. 출신보다 실제 능력을 중시한 인재 등용이 정밀한 관측 기구와 생활 기구의 제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금의 천문도를 참고해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게 했고, 이순지와 김담 등에게는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 등 주변 지역의 역법을 참고하도록 했다. 그 결과 역서인 《칠정산》 내편과 외편이 편찬되었다.

《칠정산》은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함으로써 조선이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순지는 천문과 역법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 편찬에도 참여했다. 세종 시대의 과학은 왕 개인의 관심에 머문 것이 아니라 연구 기관, 전문 인재, 관측 기구와 역서 편찬을 함께 움직인 국가적 사업이었다. 문자의 창제와 마찬가지로 과학 역시 백성의 생활과 농업에 도움을 주는 실용적인 지식으로 연결되었다.

바다와 북방에서 국경을 다지다

대외 관계에서 세종은 외교와 군사를 함께 사용했다. 명나라에는 사대정책에 따라 조공했으며 조공품보다 후한 물품을 받기도 했지만, 처녀와 금·은 같은 인적·광물 자원의 조공은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었다. 세종 시대 명나라에 보내진 공녀는 74명으로 태종 때의 40명보다 많았다. 차출된 여성들은 이송 전에 입궁해 왕비의 위로를 받았고 남은 가족은 후하게 대접받았으나, 일부는 명 황제의 후궁이 된 뒤 황제 사망 후 순장되었다. 세종은 이복동생 함녕군과 인순부윤 원민생 등을 보내 조선은 작고 척박해 금은이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고, 1430년 말·명주·인삼 등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처녀와 금은 조공을 면제받았다.

왜구 문제에는 처음 삼포 개항 같은 회유책을 모색했지만 남해안 노략질이 계속되자 무력 대응에 나섰다. 1419년 왜구가 침입하자 6월 19일 이종무를 삼도 도절제사로 삼고, 9명의 절제사와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거제도 마산포에서 출발시켜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 조선군의 피해도 적지 않아 완전한 군사적 승리라고만 하기는 어렵지만, 열흘 뒤 대마도주가 항복하고 조공을 약속했다. 이종무는 왜구에게 붙잡힌 조선인과 함께 억류되어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했다.

정벌 뒤에는 다시 교역을 통한 안정책을 폈다. 대마도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1426년 내이포·부산포·염포의 삼포를 개항했고, 1443년 계해약조를 체결해 세견선 50척과 세사미두 200석의 조건으로 무역을 허용했다. 왜구를 포용해 노략질의 원인을 줄이려는 정책이었다. 실제로 14세기부터 이어진 왜구의 침입은 삼포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약 100년 동안 소강상태를 보였다.

북방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여진 세력에 대응했다. 1432년 두만강 하류 석막을 공격해 영북진을 설치했고, 이듬해 최윤덕에게 압록강과 개마고원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하게 했다. 최윤덕의 부대가 파저강 전투에서 승리한 뒤 여연·자성·무창·우예의 4군을 두었다. 김종서의 부대는 함길도를 침입하던 여진족을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냈고, 1437년 온성·경원·경흥·부령·회령·종성의 6진을 설치했다. 이후 삼남 주민을 이주시킨 사민정책과 토관제도를 실시해 지배권을 강화하고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했다.

오늘도 세종대왕으로 기억되는 이유

세종은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에 생을 마쳤다. 그의 치세는 문자 창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백성이 익히기 쉬운 훈민정음을 만들고, 집현전을 중심으로 학문을 진흥했으며, 과학자를 후원해 천문·시간·농업에 필요한 기구와 역서를 마련했다. 재상의 성품과 능력에 맞추어 국정을 나누면서도 인사권과 군사권을 직접 관리했고, 공법과 문물 및 법전을 정비했다. 외교적 협상으로 부담스러운 조공을 중단시키는 한편, 대마도 정벌과 교역 정책, 4군 6진 개척으로 바다와 북방의 질서도 다졌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그를 단순히 묘호인 세종이 아니라 존경을 담아 ‘세종대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의 성취가 학문과 제도에만 머물지 않고 백성의 언어와 생활에 이어졌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은 남북한의 공식 문자로 살아 있고, 과학 기술과 문화의 진흥,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국방과 조세 제도의 정비는 조선 제4대 왕이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세종대왕은 지식을 현실의 문제와 연결하고 그것을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게 한 군주로 평가받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시대와 국경을 넘어 계속 기억된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