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에서 왕이 아낀 기술자로
장영실(蔣英實)은 조선(1392~1897) 세종 시대에 활동한 과학기술자이자 발명가다. 정확한 출생년과 사망년은 전하지 않는다. 《세종실록》에는 그의 아버지가 원나라 유민으로 중국 소주와 항주 출신이며,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의 기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대목에서는 어머니가 동래의 관노였다는 세종의 발언만 전한다고 설명된다. 분명한 사실은 장영실 자신이 본래 동래현에 소속된 관노였다는 점이다. 신분에 따른 제약이 엄격했던 조선 전기에 그가 국가의 천문기구 제작과 금속 기술을 맡는 관료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를 특별하게 만든다.
장영실의 재주를 먼저 알아본 왕은 조선 제3대 국왕 태종이었다. 태종은 관노였던 장영실이 기술자로서 지닌 뛰어난 능력을 인정해 발탁했다. 뒤를 이은 세종도 사람의 출신보다 실제 적성과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용적인 태도로 장영실을 중용했다. 《세종실록》은 장영실의 기술력이 뛰어나 세종이 특별히 아꼈다고 설명한다. 장영실의 등용은 한 개인의 신분 상승에 그치지 않았다. 천문 관측과 시간 측정에 필요한 기구를 직접 제작할 기술자가 국가 사업의 중심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를 지녔다.
세종은 1421년, 즉 세종 4년에 장영실을 윤사웅·최천구 등과 함께 중국으로 파견했다. 임무는 천문기기의 모양과 제작 기술을 배워 오는 것이었다. 귀국한 뒤 장영실은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았고, 1423년에는 관노 신분에서 벗어나는 면천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가 만으로 약 34세였다는 기록에 근거해 출생 시기를 1389년에서 1390년 사이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확정된 출생년은 아니다. 아산 장씨 종친회 역시 그의 출생 시기를 대략 1385년경부터 1390년경으로 주장하고 있어, 생년 문제는 오늘날까지 확실하게 결론 나지 않았다.
신분의 벽을 넘어 국가 관료가 되다
면천 이후 장영실은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5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상의원은 왕실에서 사용하는 물품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던 관청이었으며, 별좌는 그 안에서 장영실이 국가 기술자로 활동할 수 있게 한 관직이었다. 1423년의 임명은 그가 뛰어난 솜씨를 지닌 관노에서 정식 관료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세종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1424년 5월 장영실을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다. 장영실은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했지만 기술적 성과를 거듭 인정받으며 조선의 관직 체계 안에서 빠르게 자리를 높여 갔다.
세종은 승진한 장영실에게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라고 명했다. 밤의 시간을 구분해 알릴 수 있는 기구를 요구한 것이며, 이 명령을 통해 장영실의 첫 물시계가 만들어졌다. 시간 측정은 단순한 편의를 넘어 국가 운영과 연결된 기술이었다. 장영실은 이미 만들어진 장치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물의 흐름을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고 알리는 기구를 실제로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보였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 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움직임까지 모형으로 표현한 옥루로 이어졌다.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장영실은 이천이 책임을 맡은 대규모 천문기구 제작 사업에 참여했다. 이 기간에 여러 기술자가 협력해 조선이 직접 사용할 관측기구와 시계를 만들었다. 장영실은 그 중심에서 물의 힘으로 자동 작동하는 시계와 다양한 천문 관측 장치를 제작했다. 그 공으로 1433년, 세종 15년에 정4품 호군의 관직을 더했다. 이후에는 정3품 대호군에서 정3품 상호군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관노였던 기술자가 높은 무관직에 이르렀다는 과정은 세종이 장영실의 재능과 성과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준다.
스스로 시간을 알린 자격루
장영실의 대표적인 성과인 자격루(自擊漏)는 물의 흐름을 이용하면서도 정해진 시각마다 자동으로 종을 울리도록 만든 국가 표준시계였다. 장영실은 김조·이천 등과 함께 2년에 걸쳐 제작했고, 1434년 8월 5일, 음력 7월 1일에 완성해 발표했다. 자격루는 사람이 계속 물시계를 들여다보다가 시간을 외쳐야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장치가 스스로 시각을 알린다는 특징을 지녔다. ‘스스로 치는 물시계’라는 이름도 이러한 자동 작동의 성격을 나타낸다. 자격루는 보루각루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자격루의 완성은 장영실 개인의 발명인 동시에 세종 시대 국가 과학기술 사업의 결과였다. 세종은 정확한 시간을 공적으로 알리는 장치를 필요로 했고, 장영실과 동료 기술자들은 그 요구를 실제 기계로 구현했다. 수력으로 움직이며 시간마다 종을 울리는 자격루는 조선이 시간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관리할 수 있게 한 기구였다. 장영실이 1424년 왕명으로 첫 물시계를 만든 뒤 기술을 발전시켜 1434년 자동 물시계를 완성했다는 흐름은 그의 제작 능력이 한 차례의 성취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종 때의 자격루가 낡자 중종 시대에 새로운 자격루가 제작되었다. 오늘날까지 세종 때의 장치 전체가 그대로 남은 것은 아니다. 중종 때 제작된 자격루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보존되었고, 그 유물은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현존 유물이 후대에 다시 만든 장치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그 기술적 출발점에는 장영실과 김조·이천 등이 1434년에 완성한 국가 표준시계가 놓여 있다.
하늘과 계절을 기계 안에 담다
장영실은 자격루에 이어 1438년 1월 옥루(玉漏)를 완성했다. 옥루는 조선시대의 천상시계이자 자동 물시계의 하나로, 흠경각루라고도 불렸다.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짓고 그 안에 옥루를 설치했다. 이 장치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나타내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게 했으며, 천체의 시간과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물의 힘으로 움직이는 시계에 천문 현상을 표현하는 모형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장영실의 기술 세계를 잘 보여준다.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진행된 사업에서는 자격루와 옥루 외에도 여러 천문기구가 제작되었다. 천문 관측의 기본 기기인 대간의와 소간의가 있었고, 휴대할 수 있는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도 포함되었다. 정남일구는 방향을 가리키는 기능을 갖춘 해시계였다. 일성정시의는 해와 별을 이용해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기구였으며, 규표 역시 천문 관측에 사용되었다. 이 기구들은 조선이 하늘의 움직임과 시간을 관찰하고 측정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장치를 함께 마련했음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앙부일구(仰釜日晷)는 1434년, 세종 16년 이후 제작·사용된 해시계다. 장영실과 이천·김조 등이 초기 제작에 참여했으며, 혜정교와 종묘 앞에도 설치되어 사람들이 시간을 확인하는 공중시계 역할을 했다. 초기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것은 18세기에 제작된 휴대용 앙부일구로,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고 강건이 만든 기구다. 이 유물은 과학적·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었다.
금속활자에 남은 기술과 갑작스러운 퇴장
장영실의 활동은 천문기구와 시계 제작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금속제련 전문가로도 관료 생활을 이어 갔다. 1434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를 맡은 구리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했다. 당시 만들어진 갑인자는 약 20만 자에 달했다. 이전에는 두 장만 인쇄해도 활자판이 흐트러져 이를 교정한 뒤에야 다시 찍을 수 있었지만, 갑인자는 하루에 약 40장을 인쇄해도 자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판본도 깨끗했다. 이 성과는 장영실이 정밀한 기계장치뿐 아니라 금속을 다루는 국가적 제작 사업에도 참여한 기술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관료 생활은 뜻밖의 사건으로 흔들렸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뒤에도 금속제련 전문가로 일하던 중 세종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졌다. 조정은 이를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했고, 의금부는 장영실에게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다. 세종은 장영실에게 내려질 형벌을 두 등급 낮추어 주었다. 왕이 처벌을 감경했지만, 이 사건 이후 장영실은 역사 기록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후세에는 장영실의 공교한 솜씨가 간혹 회자되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는 아산 장씨 시조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다. 아산 장씨 종친회는 그의 아버지를 고려 말 전서를 지낸 장성휘라고 주장하며, 고려(918~1392)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장영실의 어머니와 장영실이 각각 관기와 관노로 전락했다고 본다. 여동생이 한 명 있었고 사촌 여동생이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러한 가계 내용은 종친회의 주장과 전승으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도 빛나는 조선 전기의 과학자
장영실은 세종이 직접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한 인물로 전해지며, 이순지·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참여한 사업은 시간을 자동으로 알리는 자격루, 천체와 계절의 움직임을 표현한 옥루, 공공장소에 설치된 앙부일구, 대간의와 소간의, 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 일성정시의와 규표, 그리고 약 20만 자 규모의 갑인자에 이른다. 각각의 기구는 시간 측정, 천문 관측, 방향 확인, 인쇄라는 서로 다른 필요를 정밀한 제작 기술로 해결하려 한 결과였다.
그의 생애에는 확실한 기록과 아직 풀리지 않은 공백이 함께 존재한다. 출생 시기는 1380년대 후반으로 추정될 뿐이며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가계에 관한 일부 내용도 종친회의 주장으로 남아 있다. 반면 동래현의 관노였던 장영실이 태종에게 발탁되고, 세종의 명으로 중국에서 천문기기를 배운 뒤 면천되어 상의원 별좌와 호군을 거쳐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과정, 그리고 국가적 과학기구 제작에 참여했다는 업적은 분명하게 전한다. 마지막에는 어가 파손의 책임을 지고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그 이전에 남긴 성과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장영실이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이유는 낮은 신분을 극복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인정받은 재능을 구체적인 기술 성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물의 흐름으로 시간을 알리고, 해와 별의 움직임을 관측하며, 해시계를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설치하고, 더 안정적으로 인쇄할 금속활자의 제작에도 힘을 보탰다. 현존 유물이 모두 그의 시대에 제작된 원형은 아니지만 자격루와 앙부일구의 이름은 국보와 보물로 이어지고 있다. 장영실은 출신보다 능력을 중시한 세종 시대의 실용적 인재 등용과 조선 전기 과학기술의 성취를 함께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