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현 관노에서 세종의 기술자로
장영실(蔣英實)은 조선 세종 때 활동한 과학기술자이자 발명가다. 생몰년은 전하지 않는다. 세종 때 상의원 별좌로 등용되어 과학 기술자로 활동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다. 《세종실록》은 장영실의 기술력이 뛰어나 세종이 특히 아꼈다고 설명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버지가 원나라 때 중국 소주·항주에서 귀화했으며 어머니는 동래의 관노였다는 것만이 세종의 발언으로 언급되어 있다.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였으나 기술자로서의 재주를 태종이 인정해 발탁했다. 실용주의자였던 세종은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해 부왕의 뒤를 이어 그를 중용했다.
중국 파견과 면천, 상의원 별좌
세종은 1421년(세종 4년) 장영실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파견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 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은 1423년(세종 5년)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다. 당시 나이가 만으로 약 34세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389년에서 139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아산 장씨 종친회는 그의 생년을 대략 1385년경에서 1390년경으로 주장한다.
면천 후 장영실은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 1424년(세종 6년) 5월에는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했고, 세종은 그에게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라고 명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첫 물시계였다.
자격루와 옥루
장영실은 세종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 아래 진행된 천문 기구 제작 사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수력으로 자동 작동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했다.
자격루(自擊漏)는 자동으로 시간마다 종이 울리도록 한 국가 표준시계다. 장영실과 김조, 이천 등이 2년간 제작해 세종 16년인 1434년 8월 5일(음력 7월 1일) 완성·발표했다. 시간이 지나 중종 때 자격루가 낡아 새로 만들었고, 중종 때의 자격루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보존되어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옥루(玉漏)는 조선시대의 천상시계(天象時計)이자 자동 물시계의 하나다. 장영실이 1438년(세종 20년) 1월에 완성했고,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했다.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과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였다.
앙부일구와 여러 천문 기구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등이 있다.
앙부일구는 1434년(세종 16년) 이후 제작·사용된 해시계로, 장영실과 이천, 김조 등이 초기 제작에 참여했다. 이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아 18세기에 제작된 것을 보물로 지정했다. 보물로 지정된 휴대용 앙부일구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로 강건이 제작한 것으로, 과학·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었다.
갑인자 주조와 어가 사건
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했다. 당시 만들어진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했으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판본이 깨끗했다. 그 이전에는 2장만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져 교정한 뒤에야 다시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뒤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 생활을 이어 가던 중 세종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은 이를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했고, 의금부는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형벌을 두 등급 낮추어 주었다고 한다.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
평가와 가계
세종은 장영실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직접 극찬했다.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한 장영실은 정3품 대호군(大護軍)에서 정3품 상호군(上護軍)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이순지, 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최고 과학자로 평가된다. 후세에도 그의 공교한 솜씨가 간혹 회자되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는 아산 장씨 시조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다. 장영실의 일족이라고 자처하는 아산 장씨는 장영실의 아버지가 장서의 8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典書)를 지낸 장성휘(蔣成暉)이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장영실의 어머니와 장영실이 관기와 관노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고, 사촌여동생이 당대의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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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장영실」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