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에서 자란 신동, 퇴계 문하의 학자
류성룡(柳成龍)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의학자·저술가였다. 1542년 11월 7일, 음력 10월 1일에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 서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어머니 안동 김씨의 친정이 있는 외가였다. 본관은 풍산,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며, 뒤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복시정 류소의 4대손이자 류자온의 증손으로, 조부는 간성군수를 지낸 류공작, 부친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이었다. 그는 류중영의 차남이었고 친형은 류운룡이었다.
류성룡은 세 살 때 《대학》을 읽어 신동으로 평가받았다. 열일곱 살에는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 갔다가 심통원이 그곳에 두고 간 《양명집》을 구해 읽었다. 그러나 스승 이황이 양명학을 사학이자 학문의 정통을 해치는 이단으로 규정하자 관심을 끊고 이를 비판했다. 그렇다고 양명의 학설 전체를 무조건 배척한 것은 아니며, 그 가운데 장점은 취했다. 스물한 살에는 종숙 류중엄, 형 류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훗날 통신사로 일본에 간 조목·김성일과도 동문으로 수학했고, 성리학에 정통한 학자로 성장했다.
1564년 명종 때 사마시에 합격한 류성룡은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에 들어갔고, 이어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했다. 1569년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현지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이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이조 정랑 시절에는 이준경의 관직을 삭탈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인성 대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예조가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설을 주장하자, 류성룡은 적손의 예에 따라 3년설이 타당하다고 논박했고 그의 견해대로 시행되었다.
붕당의 한가운데서 선택한 온건한 정치
조선 중기 정치에서는 관리 임명과 국정 운영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동인과 서인의 붕당 대립으로 이어졌다. 심의겸이 김효원의 이조전랑 천거를 반대했을 때, 이황의 제자였던 류성룡은 심의겸을 변호하지 않고 김효원을 옹호했다.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이 갈라지자 그는 동인에 참여했다. 이후 응교, 경연 검토관, 직제학, 부제학, 도승지, 1582년부터 1583년까지 대사헌, 대제학 등 핵심 관직을 맡으며 승진했다. 상주 목사로 나가서는 예절로 고을을 다스렸다.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할 때 함경도 관찰사와 성균관 대사성 등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의주 목사 서익이 상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고 탄핵하자, 류성룡은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머물렀다. 뒤에 형조 판서로 부름을 받아 대제학을 겸했고, 1590년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정여립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벌어지자 정여립의 여러 글에서 류성룡을 비롯한 많은 사대부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서인 정철은 유생 정암수를 움직여 류성룡과 이산해 등을 사건에 얽어 넣으려 했지만,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암수 등 50여 명은 이산해·류성룡·나사침·나덕준·정인홍·정개청이 정여립과 한몸 같은 사이라며 물러나게 해 달라고 상소했다. 선조는 크게 노해 오히려 이산해와 류성룡을 만나 위로하고 정암수 이하 10여 명을 처벌하라고 명했다.
정철의 처벌 문제는 동인을 다시 갈라놓았다. 이산해와 정인홍은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류성룡과 우성전은 정승까지 지낸 고관을 차마 죽일 수 없다며 유배에 그치는 선처를 호소했다. 이산해는 기축옥사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겠느냐며 온건론을 비판했다. 정인홍 등도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격했고, 우성전의 축첩과 상중 처신까지 논쟁에 등장했다. 결국 동인은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 북인과 죽이지 말고 유배하자는 온건파 남인으로 갈라졌다. 좌의정과 이조 판서를 겸하던 류성룡은 남인의 중심에 서서 이산해와 대립하게 되었다.
전쟁을 내다본 외교와 장수를 고른 안목
류성룡은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좌의정 재직 중에는 일본이 자기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내왔다.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지만 류성룡은 명나라에 사실을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의견대로 실행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명나라가 일본과 조선이 공모한 것이 아닌지 의심할 때, 앞서 국서의 내용을 알린 조치는 조선에 대한 의혹을 차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591년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하자 류성룡은 권율·이순신·신충원을 추천했다. 이순신은 전라도에, 원균은 경상도에 배치되었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였고, 류성룡은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도 죽마지우였다. 따라서 이순신을 천거한 배경에는 그의 능력에 대한 판단뿐 아니라 이요신과의 오랜 친분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서술된다. 결과적으로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열세에 놓인 조선의 전세를 뒤집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류성룡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한 인물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전쟁 직전 류성룡의 판단에는 뼈아픈 한계도 있었다. 일본의 요청에 따라 조선은 서인 황윤길을 정사,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삼아 1591년 2월 통신사를 파견했다. 이들은 1592년 2월 귀국했고, 3월 황윤길은 일본이 곧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김성일은 그럴 염려가 없다며 대비책에 반대했다.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조차 황윤길의 견해에 동조했지만, 좌의정 류성룡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정의 논의는 침입 우려가 없다는 쪽으로 끝났고 대비도 중단되었다. 훗날 《징비록》을 남긴 그의 삶을 이해하려면 인재를 천거한 공과 함께 이 판단의 책임도 외면할 수 없다.
임진왜란의 조정을 지휘한 재상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류성룡은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란했다. 송도에 이르러 이산해가 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류성룡이 후임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신잡은 그가 김성일의 보고에 동조해 방비를 중단하게 한 책임이 있다고 반대했고, 류성룡도 그날 좌의정에서 물러나 관직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피란길에는 패전 뒤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방어 사령관 이일을 만났다. 이일은 몸에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짚신만 신은 상태였고, 류성룡은 선조가 그 모습을 보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철릭을 가져오게 해 입혔다.
류성룡은 이후 다시 국정의 중심으로 돌아와 4도 도제찰사와 영의정으로 조정과 군무를 총괄했다. 이듬해 관서 도체찰사가 되어 안주에 머물면서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묻고 군량을 준비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는 평양 지도를 건네 전투 수행에 편의를 제공했다. 전쟁 중 인재를 등용하고 여러 개혁 정치를 시행해 피해를 수습하려 했기 때문에, 무너진 나라의 산하를 다시 세웠다는 뜻의 ‘재조산하를 이룬 재상’으로 평가받았다. 예악을 통한 교화에서 군사 운영과 재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고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1597년 이순신이 역모 혐의로 몰렸을 때의 류성룡 행적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징비록》에서 그는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했기 때문에 사이가 나쁜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했고, 선조 앞에서 직접 이순신을 변호했다고 썼다. 또한 선조가 1월 자신을 경기 지방 순찰에 보냈으며 한 달 뒤 돌아와 보니 이순신이 이미 죄인이 되어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사직을 결심해 2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 10여 차례 사직 상소를 냈다고 밝혔다. 반면 《선조실록》에는 류성룡이 과거 이순신을 천거한 일을 두고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하며 탄핵에 동조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원익과 정탁이 이순신을 옹호해 참수형을 면하게 했고, 이순신은 백의종군한 뒤 복직하여 정유재란의 명량해전에서 다시 조선을 구하는 활약을 펼쳤다.
관직을 내려놓고 《징비록》을 쓰다
다시 영의정에 오른 류성룡은 1598년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류성룡은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인홍·이이첨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았다. 노량해전과 같은 날 그는 영의정에서 물러나고 관직까지 삭탈당했다. 고향 안동으로 내려간 뒤에는 선조가 다시 불러도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600년 복권된 뒤에도 여러 차례의 부름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이 시기 친형과 어머니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고, 아들과 큰조카, 제자이자 조카사위인 김홍미까지 잃는 우환을 겪었다.
은거한 류성룡은 임진왜란에서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징비록(懲毖錄)》 집필에 몰두했다. 전쟁을 지휘한 최고위 재상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못을 경계하고 앞날을 대비하도록 남긴 저술이라는 점에서 그의 정치 인생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대표작이다. 이 책은 일본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도 《서애집》, 《난후잡록》, 《진사록》, 《근폭집》을 남겼고, 의학자로서 침과 뜸에 관한 《침경요결》도 저술했다.
류성룡은 1604년 호성공신에 책록되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1605년에는 청난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07년 5월 31일, 음력 5월 6일에 66세, 만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호성공신 2등과 풍원부원군에 책록되었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당은 병산서원 뒤에 세워졌으며 여산의 퇴계묘에 함께 모셔졌다. 호계서원·병산서원·남계서원·삼강서원·도남서원·빙계서원 등에도 위패가 봉안되어 제향되었다.
공과 과를 함께 남긴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은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하게 살았던 청백리이자 ‘조선의 5대 명재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정계에서 물러난 지 8개월 뒤인 1599년 7월, 선조는 류성룡이 떠난 뒤 국사가 날로 엉성하고 해이해지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이미 삭직했더라도 끝내 복관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뜻을 밝혔다. 이는 전쟁기 조정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의 무게를 보여주는 평가다.
동시에 비판도 존재한다. 북인 성향 편찬자의 평이 실린 《선조실록》은 그가 재상으로서 그릇이 작고 붕당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으며,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주관 없이 그때그때의 대세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는 평가도 담겼다. 다만 《선조실록》은 뒤에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질이 낮다는 평가를 받아 효종 때 《선조수정실록》으로 다시 편찬되었다. 그렇다고 수정실록 역시 완전히 공평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류성룡이 속한 남인의 반대 세력인 서인이 편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류성룡이 기억되는 이유는 그를 흠 없는 영웅으로 만들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이순신·권율 같은 장수를 천거하고 전쟁 중 국정과 군무를 책임졌으며, 군량과 전투 정보를 마련해 위기에 빠진 조선을 수습했다. 반면 일본의 침입 가능성을 둘러싼 판단과 이순신 탄핵 과정에서는 책임과 논쟁을 남겼다. 무엇보다 그는 그 성공과 실패, 후회와 교훈을 《징비록》에 기록해 다음 세대가 같은 잘못을 경계하도록 했다. 전쟁을 극복한 재상이면서 자신의 시대를 반성의 기록으로 남긴 저술가였다는 점이야말로, 류성룡이 지금도 한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읽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평가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