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月南) 이상재는 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2등서기관으로 수행해 청국 공사와 담판을 벌였고, 1896년 서재필·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한 개화파 관료다. 국권을 잃은 뒤인 1913년에는 YMCA 총무를 맡아 무너지기 직전의 청년회를 지켰다. 1927년 2월 15일 결성된 신간회의 창립회장으로 추대됐고, 그해 3월 29일 경성의 전셋방에서 숨졌다.
충청도 선비 집안에서 개화파 관료로
이상재는 1850년 10월 26일 한산군에서 태어났다. 한산군은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이다. 본관은 한산이고, 아버지는 이희택(李羲宅), 어머니는 밀양박씨다. 그의 집안은 고려 말 학자 이색의 후손이다. 1867년 과거에 응시했지만, 관리들이 관직과 합격을 사고팔던 탓에 낙방했다. 이상재는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고향에 숨어 살려 했다. 그러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를 받아들여 1880년까지 승지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개인 비서로 일했다. 조정의 신임을 받던 개화파 지식인 박정양과의 만남은 이상재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881년 조선 조정은 일본의 근대 문물을 둘러보도록 신사유람단을 보냈다. 이상재는 박정양의 추천을 받아 이 시찰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보고 겪은 사회 발전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여정에서 홍영식(洪英植)과 깊이 사귀었고, 이 인연으로 1884년 새로 생긴 우정총국의 주사가 되었다. 그해 12월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워싱턴에서 지킨 외교의 자주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었다. 이상재는 그를 2등서기관으로 수행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이 미국과 직접 외교관계를 맺는 것을 막으려 했고, 조선의 국서 전달도 방해했다. 이상재는 청국 공사와 직접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박정양은 청나라를 거치지 않고 홀로 미국 측에 국서를 건넬 수 있었다. 귀국 뒤에는 청나라의 압력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892년 그는 전환국위원으로 관직에 돌아왔다. 1894년에는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을 지냈고, 학무아문참의 겸 학무국장도 맡았다. 이 시기에 신교육제도를 마련해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세웠고, 한동안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는 외국어학교 교사를 일본인으로만 뽑으라고 요구했다. 이상재는 이를 거절하고 미국인과 프랑스인 교사를 채용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그리고 옥중 신앙
조선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는데, 그 직전인 1896년 이상재는 내각총서와 중추원1등의관을 거쳐 내각총무국장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그는 부패한 관리를 몰아내는 데 힘썼다. 같은 해 7월에는 서재필(徐載弼)·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들었다. 독립협회가 연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에서는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았다.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는 외세 배척과 황권 확립을 비롯한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그는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갇혔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이 간곡히 상소해 10일 만에 풀려났다. 또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관민공동회를 열어 헌의6조를 결의했다. 헌의6조는 군주의 전제권을 제한하고 내각이 책임지고 행정을 맡도록 하자는 건의였고, 고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 조병식(趙秉式)·유기환 등의 반격을 받았고, 11월 4일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려졌다. 훗날 사학자 문일평은 이상재·윤치호·서재필을 독립협회의 세 기둥이라 평했다.
독립협회는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를 받다가 1898년 12월 25일 해산되었다. 이상재는 모든 벼슬을 내려놓고도 탐관오리의 부패를 계속 탄핵했다. 그 때문에 정부 대신들의 미움을 샀다.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구금되었고, 1904년 2월에야 석방되었다. 아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감옥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함께 갇혔던 이승만과 가까워졌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고, 이승만이 미국에서 유학할 때 생활비를 지원했다.
국권을 잃은 뒤 청년과 YMCA를 지키다
석방 뒤 그는 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 등 옥중 동지들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들어갔고, 초대 교육부장을 맡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고종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잠시 의정부참찬을 지냈다. 1907년에는 법부대신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사양했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관계를 완전히 떠났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어용단체 유신회(維新會)를 앞세워 청년회를 무너뜨리려 했고, 간부들은 쫓겨나거나 갇히거나 망명했다. 이상재는 그해 총무를 맡아 무너지기 직전의 청년회를 지켰다.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와 세브란스·배재·경신 등 각지 학생 YMCA를 묶어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다른 민간단체가 모두 해산된 시기에 YMCA가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살아남아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다만 민족대표 33인이 조선독립선언문에 서명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는 이를 거부했다.
1920년대에도 활동은 이어졌다. 그는 YMCA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 회장으로서 물산장려운동과 소년척후대(보이스카우트)운동을 이끌었고, 강연회와 농촌운동도 주도했다. 1922년에는 YMCA 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에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 YMCA가 세계연맹에 단독으로 가입할 길을 열었다. 같은 해 조선교육협회를 세워 회장이 되었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도 이끌었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을, 1925년에는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을 맡았다. 1925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식에서는 내빈 대표로 축사를 하며 이렇게 말하고 조선말로 축사를 읽었다. “여러분, 조선말 들으실 줄 아시오? 나는 일본말을 몰라서 조선말로 하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청년들과 어울렸고, 이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에게 “내가 청년이 돼야지,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 없다”고 답했다.
신간회 회장과 빈손의 마지막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손잡고 신간회를 결성했다. 이상재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창립회장을 수락했다. 그해 3월 29일 그는 경성의 전셋방에서 78세로 숨졌다. 평생 재물을 탐하지 않은 그는 쌀 27가마의 빚을 남겼다. 윤치호·이승만·김성수·안창호·송진우 등이 모금해 이 빚을 갚았다. 장례는 4월 7일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고향 한산의 선영에 묻혔다. 1957년에는 경기도 양주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신도비 비문은 정인보(鄭寅普)가, 묘비 비문은 변영로(卞榮魯)가 지었다.
그를 기리는 평가도 많다. 서재필은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적었다. 송진우는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고 일신은 근심하지 않아 머리는 희고 마음은 붉었다”고 평했고, 윤치호는 그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인 분”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서울 종묘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국권을 잃은 뒤 그는 교육 계몽 활동에 나서 청년들에게 깨달음과 실력 양성을 당부했다. 유머가 넘치는 밝은 성격이라 ‘만년청년’으로 불렸다. 이념이 갈린 독립운동 세력이 함께 만든 신간회의 첫 회장이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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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이상재」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이상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