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나철, 대종교 창시와 항일 구국운동의 전개…한국사 인물

나철은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하다 유배됐으며, 이후 대종교를 창시해 독립정신을 고취한 대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다. 그는 1863년 12월 2일 전라도 보성에서 태어나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관료의 길에서 구국운동으로

나철은 1863년 12월 2일 전라도 보성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나주다. 본명은 나두영이며 나인영·나철로 개명했고, 자는 문향, 호는 홍암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힌 그는 1883년 충주진영으로 떠났고 수원유수부를 거쳐 한성부에서 공부했다. 1891년 문과 병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가주서와 승문원권지부정자 등을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1898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침략이 거세지자 나철은 호남 지역 지사들과 행동에 나섰다. 1904년 오기호, 이기, 최전 등과 비밀단체 유신회를 조직해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6월에는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 · 일 · 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제시했다. 응답을 얻지 못하자 일본 궁성 앞에서 3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였다.

을사오적 암살 계획과 유배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맺으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철은 매국노를 제거해 국정을 바로잡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단도 두 자루를 마련해 귀국했으며, 1906년에는 다시 일본을 찾아 오카모토와 도야마 등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귀국길에는 폭탄이 든 선물상자를 구입해 을사오적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 계획도 실패했다.

나철은 이철과 강원상 등을 규합해 자신회를 결성했고, 이 조직은 뒤에 오적 암살단으로 개편됐다. 1907년 1월부터 계획을 구체화해 3월 25일 거사를 시도했지만 서창보 등이 체포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나철은 동지들이 받는 고문을 줄이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 등과 평리원에 자수했다. 그는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그해 풀려났다. 1908년에는 외교적 방법으로 구국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일본에 갔지만 소득 없이 귀국했다.

단군교 창시와 대종교의 확장

나철은 이후 민족 종교를 통한 구국운동에 힘을 집중했다. 1909년 2월 5일 오기호, 강우, 유근, 정훈모, 이기, 김인식, 김춘식 등 동지들과 서울 재동에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했다. 그는 교단의 초대 도사교가 되어 5대 종지를 발표했다. 대종교는 이날을 중광절로 기념한다.

나철은 단군의 개국과 입도를 구분하고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한 천신강세기원을 제시했다. 교단은 1910년 8월 단군교라는 이름을 대종교로 바꿨다. 1911년에는 삼신일체의 원리로 대종교의 신관을 설명한 『신리대전』을 발간했다. 나철은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과 평양 숭령전을 순방했으며,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는 교당과 지사를 세웠다.

한일 병합 뒤 교단은 일제의 박해를 피해 활동 중심을 만주로 옮겼고,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4년 3월 13일에는 대종교 본사가 만주로 이전돼 포교 지역이 만주 일대로 넓어졌다.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해 대종교를 불법화하고 탄압했다.

구월산에서 맞은 최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놓이자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4일 상교 김두봉을 비롯한 시봉자 6명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수행했다. 그는 사당 앞 언덕에서 북쪽의 백두산과 남쪽의 선조 묘소를 향해 참배했다. 이어 문 앞에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써 붙이고 수도에 들어갔다.

음력 8월 16일 새벽까지 인기척이 없자 제자들이 문을 열었고, 나철은 전날인 음력 8월 15일 폐기법으로 숨을 거둔 상태였다. 양력으로는 1916년 9월 12일이다. 그는 한배검에게 제천하고 대종교와 한배검,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뜻을 담은 순명삼조를 유서로 남겼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만주 청파호 언덕에 안장됐으며, 대종교는 그가 운명한 음력 8월 15일을 가경절로 정해 4대경절 가운데 하나로 기념한다.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유산

나철 뒤를 이은 2세 교주 김교헌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으로 옮기고 홍범규칙을 공표했다. 김교헌이 조직한 비밀결사 중광단은 무장독립운동단체 북로군정서로 발전했으며, 북로군정서는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듬해 대토벌작전을 벌여 많은 대종교 교도를 학살했다. 김교헌은 『신단실기』, 『신단민사』, 『단조사고』를 저술해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그 역사를 고증하려 했다.

3세 교주 윤세복은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인 동경성으로 옮겼다. 그는 대종학원과 대종교서적간행회를 세우고 『삼일신고』와 『종지강연』 등을 간행했다. 1942년 11월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는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단체를 구성했다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며, 고문으로 숨지거나 옥사했다.

나철의 장남 나정련과 차남 나정문도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두 사람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나철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그는 을사오적 암살 계획과 외교 활동에 그치지 않고 대종교를 창시해 독립정신을 고취했으며, 그가 세운 교단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나철이 오늘날에도 대종교인과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는 까닭은 종교 운동과 항일 구국운동을 함께 추진한 그의 생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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