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시영,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임시정부 재정 활동…한국사 인물

[독립운동가] 이시영,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임시정부 재정 활동…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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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은 1868년 12월 3일 조선 한성부 저동에서 태어나 1953년 4월 17일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국권피탈 뒤 형제들과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와 재정을 맡았으며,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명문가 관료에서 국권 회복 운동가로

이시영은 1868년 12월 3일 조선 한성부 저동에서 이조판서와 의정부우찬성을 지낸 이유승과 동래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성흡, 호는 성재와 시림산인이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과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종성의 후손으로, 대대로 문무 관료를 배출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첫 부인은 김홍집의 딸인 경주김씨였으며, 뒤에 박승문의 딸인 반남박씨와 재혼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이시영은 1885년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됐고 관직에 진출했다. 형조좌랑과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8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승정원부승지·우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지냈다. 1895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회영·이상설 등과 근대 학문을 탐구했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으로 일하던 그는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에 반대했다.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라고 요구했으나 조약이 받아들여지자 사직했고, 박제순 집안과 맺으려던 조카의 혼약도 파기했다. 1906년 평안남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에는 근대학교 설립과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이후 중추원칙임의관, 한성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 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했으며, 안창호·전덕기·이동녕·이회영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해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했다.

가산을 독립군 교육으로 바꾼 서간도 망명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됐으나 이시영은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말 건영·석영·철영·회영·호영 등 형제들과 가재를 독립운동 재원으로 내놓고 가족을 이끌어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망명했다.

이시영을 비롯한 망명 인사들은 1911년 4월 삼원보 대고산에서 노천군중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주 동포의 정착과 교육,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을 추진했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됐다. 이시영은 1912년 통화현 합니하에 토지를 마련해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대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옮겨졌고 합니하 교사는 분교 역할을 맡았다. 학교에서는 이론과 병법, 전술을 가르쳤으며 3·1운동 이후에는 학생이 600명에 이를 만큼 청년들이 모였다.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배출한 간부는 3,500여 명이었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서간도 독립군 양성의 중심지가 됐다.

임시정부의 법무와 재정을 지킨 활동

이시영은 1913년 9월 북경에서 위안스카이 정부와 한·중 연합전선 결성을 도모했으나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계획을 이어가지 못했다. 1919년에는 북경에서 이동녕·조성환·이회영 등과 국내 3·1운동에 호응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어 상하이로 이동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초대 법무총장을 맡았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재무총장이 됐고, 1926년 무렵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며 자금 조달에 힘썼다. 임시정부의 존폐를 둘러싸고 고수파·창조파·개조파가 갈렸을 때에는 김구·이동녕 등과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1922년에는 시사책진회와 한국노병회 결성에도 참여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해 감찰위원장을 맡았고, 1931년에는 임시정부 인사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항저우에 거처를 마련했다. 1933년 자싱에서 김구·이동녕·송병조·차리석·조완구·김붕준 등과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됐다. 1934년에는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저서 『감시만어』를 펴냈다.

1935년 김구 등과 임시정부 지원 정당인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감사를 맡았다. 중일전쟁으로 임시정부가 여러 지역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한 뒤에도 국무위원·재무부장·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일했다. 재정과 예산 분야를 담당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 10개조의 기초에도 참여했으며, 1944년에는 임시정부 감찰위원장에 임명됐다.

교육으로 이어진 귀국 이후의 선택

이시영은 1945년 11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귀국했다.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을 맡았고 대종교에서도 원로원장과 사교 등의 직책을 지냈다. 귀국 직후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했으나 무관학교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자 교육기관 설립으로 방향을 바꿨다.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을 세우고 신흥전문학관을 운영해 1·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교육기관은 한국전쟁을 거친 뒤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됐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했으며,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논쟁에서는 남한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초대 부통령과 권력에 대한 결별

이시영은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2차 투표 133표를 얻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이승만에게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을 일부 등용할 것을 권고했으며,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피란한 그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지켜보며 제1공화국 정부에 대한 깊은 실망감에 빠져 부통령직 사퇴를 결심했다. 1951년 5월 9일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 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52년 8월 5일 제2대 대통령선거에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승만은 서울 저동 13번지 주변의 땅 2만평을 주려 했으나 이시영은 거절했다. 그는 “내 집 찾으려 만주를 돌며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1953년 4월 17일 부산 동래의 임시 거처에서 “완전 통일의 그날을 못보고 눈감으니 통한스럽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서울 정릉에 안장됐다가 1964년 수유리 묘소로 이장됐다.

재산보다 독립과 공공의 책임을 택한 삶

이시영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를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국권피탈 뒤에는 형제들과 재산을 내놓고 독립군 교육에 나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했고, 초대 부통령이 된 뒤에는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해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일 정도로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었음에도 개인적으로 사치하지 않고 근검절약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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