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신윤복, 조선 후기 풍속화와 《미인도》를 남긴 화원

[조선] 신윤복, 조선 후기 풍속화와 《미인도》를 남긴 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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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 가문에서 태어난 혜원

신윤복은 영조 34년인 1758년, 아버지 신한평과 어머니 홍천 피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으며 출생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릴 적 이름은 가권이었고 뒤에 윤복으로 고쳤는데, 본명이 가권이었다는 사실은 뒷날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대표작 미인도에서 드러났다. 그림에 찍힌 ‘신가권인’이라는 도장이 단서가 됐다.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입보, 호는 혜원이다. 그에게는 남동생 신윤도와 여동생 한 명이 있었다.

서화가 오세창은 1916년에 쓴 《화사양가보록》과 《근역서화징》에서 그를 두고 “자는 입보요, 호는 혜원이고 고령인이다. 신한평의 아들이고 풍속화를 잘 그렸다”고 적었다. 성호 이익의 손자 이구환은 신윤복의 행적에 대해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지내고, 마치 방외인 같으며 여항인들과 잘 어울린다”고 전했다.

도화서 화원으로 지낸 세월

아버지 신한평은 차비대령화원 자리를 스물여섯 해 가까이 지키며 영조의 어진을 두 차례나 그릴 만큼 솜씨를 인정받은 화가였다. 그런 그도 정조 초기에는 알아보기 힘들게 그려낸 그림 한 점 때문에 관료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간 적이 있다. 관직은 첨절제사에 이르렀고, 산수와 인물, 초상, 화훼를 두루 능숙하게 다뤘다. 아버지의 길을 따른 신윤복 역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첨정과 첨절제사 벼슬을 지냈다.

그는 인물화와 풍경화 못지않게 많은 풍속화를 남겼는데, 그림 속에서 양반의 위선과 겉과 속이 다른 태도를 꼬집고 여성들의 자유로운 연애와 애환을 해학 섞어 그려냈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때껏 이어지던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가 가라앉자 그의 화업도 함께 저물어 갔다. 지금 전하는 그림 가운데 가장 늦은 제작 연대는 1813년이며, 그 뒤 언제 어디서 눈을 감았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붓끝으로 그려낸 조선 후기의 풍경

신윤복은 산수화와 화조영모화, 고사인물화를 모두 능숙하게 그린 직업 화가였지만, 여인의 삶을 담은 그림에서 가장 빼어난 솜씨를 보였다. 《미인도》 속 여인은 단정하게 틀어올린 트레머리에 연미색 삼회장저고리, 폭이 넉넉한 옥색 치마 차림으로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밖에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에는 〈단오도〉, 〈연당의 여인〉, 〈무무도〉, 〈산궁수진〉, 〈선유도〉가 전하며, 산수화로는 〈송정아회도〉, 〈송정관폭도〉, 〈계명곡암도〉가 남아 있다.

그는 아버지 신한평과 김홍도의 기법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소재를 고르는 방식과 화면 구성, 인물을 그리는 법, 채색 방법에서 김홍도와는 분명히 다른 길을 갔다. 기녀와 무속, 주점의 은밀한 풍경을 즐겨 그린 그의 화풍은 유교 사회를 향한 예술적 항의이자 인간주의의 표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그림 배경에는 당대의 살림살이와 옷차림이 사실적으로 녹아 있다. 다만 대부분의 그림에 짧은 찬문과 관지, 도장만 곁들여져 있을 뿐 제작 시기를 밝혀 두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해 갔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조선 4대 풍속화가, 오늘의 시선으로 보다

신윤복은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 4대 풍속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양반을 조롱하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신의 이름과 도장을 당당히 남겼는데, 유교 윤리가 엄격했던 그 시절에는 보기 드문 대담함이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고, 그 덕분에 거침없는 화풍을 이어갈 수 있었다.

현대 대중문화에서는 신윤복을 여성으로 바꿔 그린 각색도 나왔다.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을 원작으로 한 2008년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배우 문근영이 남장을 하고 신윤복을 연기했고, 같은 해 영화 《미인도》에서는 배우 김민선이 극 중 여성으로 소개되는 신윤복 역을 맡았다. 이 같은 성별 각색을 두고 한국 미술사학계에서는 실제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바람의 화원》은 그림을 그린 나이 설정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됐다.

중인 신분의 화원이었던 신윤복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남긴 그림들이 조선 후기 사람들의 일상과 정서를 가장 생생하게 비춰 주기 때문이다. 양반 사회의 위선을 붓끝으로 짚어 내고 여성의 삶을 화폭에 옮기는 데 거침이 없었던 그의 작업은 《미인도》와 《혜원전신첩》으로 남아, 지금도 간송미술관에서 조선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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