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왕순
고려 제8대 국왕 현종은 992년 8월 6일, 음력 7월 1일이자 율리우스력 8월 1일에 태어났다. 휘는 순, 자는 안세이며, 즉위 전 작위는 대량원군이었다. 불교 승려로 지낼 때의 법명은 선재였다.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왕욱으로 훗날 안종으로 추승됐고, 어머니 헌정왕후 황보씨는 태조의 손녀이자 경종의 제4비였다.
경종이 981년에 사망한 뒤 궁 밖에서 살던 헌정왕후는 이웃에 있던 왕욱과 가까워져 아이를 가졌다.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 관계였으며 정식 혼인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임신은 당시 왕실에서 심각한 문제가 됐다. 전해지는 설화에는 헌정왕후가 곡령에서 소변을 보자 온 나라가 은빛 바다로 변하는 꿈을 꾸었고, 점쟁이에게서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질 것이라는 점괘”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자 국왕 성종은 왕욱을 사수현, 현재의 사천시로 귀양 보냈다. 헌정왕후는 왕순을 낳은 직후 세상을 떠났고, 왕순은 성종의 명으로 보모 또는 유모에게 맡겨졌다. 기록에는 어린 왕순이 궁에서 성종의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아비, 아비”라고 불렀고, 성종이 눈물을 흘린 뒤 그를 왕욱에게 보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왕순은 996년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사수현에서 함께 지냈으며, 997년 개경으로 돌아왔다.
승려 생활과 거듭된 암살 위기
대량원군에 봉해진 왕순은 12살 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위기에 휘말렸다.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했고, 왕순을 숭교사로 보내 승려가 되게 했다. 숭교사에 자객이 거듭 나타나자 목종과 사찰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 신혈사로 옮겼으며, 이 절은 현재 서울 진관사에 해당한다.
신혈사의 주지 진관대사는 왕순을 지키기 위해 땅굴을 파고 그 위에 침대를 놓았다. 왕순은 이곳에 몸을 숨겨 여러 차례의 암살 위기를 넘겼다.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폐위한 정변을 일으켜 왕순을 왕위에 올렸고, 강조는 1009년 2월부터 1010년 11월까지 실권을 장악했다. 현종의 재위 기간은 1009년 3월 8일, 음력 2월 3일이자 율리우스력 3월 2일부터 시작됐다.
거란의 침입과 무너진 수도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했다. 현종은 강조에게 30만 군대를 맡겨 방어하게 했지만 고려군은 패배했고, 수도 개경도 점령됐다. 현종은 지채문의 호위를 받으며 나주까지 피난한 뒤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 피난길은 기록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전해진다. 창화현에서는 아전에게 무기를 빼앗겼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왕을 향해 활을 쏘았다. 공주를 떠날 때에는 임신한 왕후와도 헤어져야 했으며,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실패했다. 중앙정부가 사실상 와해된 동안 각 지역의 장수들이 거란군을 물리쳤다. 현종은 공주에 머물면서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었고, 그의 딸들은 뒤에 왕후가 됐다.
전쟁 비용이 크게 늘어 관리들의 녹봉이 부족해지자 조정은 1014년 11월 경군 무신들의 영업전을 거둬들였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상장군 최질과 김훈 등은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붙잡아 궁궐로 들어갔고, 현종 앞에서 두 사람을 매질했다. 이들은 전공에도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며 공이 큰 무신도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현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현종은 1015년 이자림과 계획을 세우고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서경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에 취한 무신들을 공격해 장군 19명을 죽였으며, 이 사건 뒤 문치가 확고해졌다. 요사의 기록에는 거란이 이 일을 파악했고, 거란 조정에서 제3차 침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고 나온다.
1018년 거란은 현종에게 입조를 요구하며 다시 침입했다.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너뜨린 귀주대첩으로 고려는 위기를 넘겼다. 현종은 두 차례의 거란 침입 때문에 피난해야 했지만, 비극적인 어린 시절과 정변으로 혼란스러운 즉위 과정을 지나 전쟁에 대응하고 침입을 막아냈다.
전후 국가 재건과 문화 사업
전쟁 뒤 현종은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지방 세력을 규제해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외가와 가까운 구 신라계 인사들도 주요 관직에 발탁했다.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과 호족을 경계하는 한편, 거란과 변방 야인의 침입에 대응해 송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했다.
행정 체계도 손질했다. 1022년 향리 우두머리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 향과 부곡 등에서는 장으로 간소화했다. 1024년에는 개경을 넓혀 5부 35방 314리로 정했다. 조성도감을 설치한 뒤 1029년 8월 재위 20년에 길이 23km의 나성을 완성했으며, 1011년 8월에는 개경의 황성을 증축하고 태조의 뜻을 이어 장락궁에 새로운 황성을 쌓았다.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감목양마법을 제정했으며, 조세를 고르게 거두기 위한 정책과 양창수렴법도 시행했다. 성종 이후 중단됐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열었다. 유교 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설총과 최치원에게 작위를 추증하고, 두 인물을 처음으로 문묘에 모셔 제사를 지내는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여요전쟁 과정에서 소실된 고려실록은 다시 편찬하게 했다. 불교 사업으로는 초조대장경 간행을 추진하고 교종의 대사찰인 현화사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이 사업들은 전쟁을 치른 고려가 기록과 종교 문화를 정비한 현종대의 주요 성과로 남았다.
전쟁을 견디고 제도를 세운 군주
현종은 1031년 6월 23일, 음력 5월 25일이자 율리우스력 6월 17일에 40세로 사망했다. 능은 경기도 개풍의 선릉이며, 묘호는 현종이다. 시호는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이며 원문이라고도 전한다.
현종은 왕실의 복잡한 출생 배경과 암살 위기, 강제 출가, 정변, 수도 함락과 피난을 모두 겪었다. 그의 치세에는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쳤고, 전쟁 뒤에는 행정과 경제 제도를 다듬고 개경의 방어 시설을 확충했다. 고려실록 재편찬과 초조대장경 간행, 연등회와 팔관회 부활, 문묘종사의 시작도 그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는 업적이다. 다만 무신들의 불만을 일단 받아들인 뒤 서경 잔치에서 19명의 장군을 제거한 일은 왕권과 문치를 확립하는 과정에 가혹한 권력 행사가 함께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종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는 거란과의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넘긴 데 그치지 않고, 흔들린 고려의 통치 체계와 기록·종교·도시 기반을 다시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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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현종 (고려)」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