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은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다. 1909년 네브래스카 커니의 한인 농장 안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열었고, 1914년 6월에는 하와이 가훌루의 아후이마누 지역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해 군사훈련으로 독립전쟁에 대비한 인원을 길렀다.
철원에서 한성감옥까지, 계몽운동가의 출발
박용만은 1881년 8월 26일 강원도 철원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 연도에는 1882년, 1879년, 1875년이라는 다른 설도 있지만 보통 1881년설을 채택한다. 호는 우성(宇醒)이다.
1904년 일본은 한국의 황무지를 개간할 권리를 요구했다. 보안회가 이에 맞선 반대 운동을 이끌었고, 박용만도 여기에 참여했다가 한성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그는 이승만, 이동녕, 이상재, 이시영, 정순만 등과 동지가 되었다. 특히 이승만, 정순만과는 의형제를 맺어 ‘3만’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풀려난 뒤에는 숙부 박희병이 있던 평안남도 순천의 사립시무학교에서 유일한 등 소년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04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세운 한인소년병학교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주 링컨고등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는 1906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정치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숙부와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노동 이민자를 위한 한인직업소개소도 운영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밀사를 돕기 위해 윤병구와 송헌주를 헤이그로 보냈다. 1908년 3월에는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과 전명운의 변호 비용을 모금했다.
그가 꾸준히 추진한 일은 독립전쟁에 나설 군인을 기르는 것이었다. 1908년 7월 덴버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해외애국동지대표자회의가 열렸고, 박용만은 이 회의에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내 통과시켰다. 같은 해 9월에는 네브래스카 대학교에 편입했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군사학을 부전공으로 삼았으며 ROTC 과정도 마쳤다. 1908년 12월에는 박용만이 네브래스카주 정부에, 정한경이 커니지방정청에 교섭했다. 헌법상에 없는 한인군사학교였지만 그 운영을 묵인받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1909년 네브래스카 커니의 한인 농장 안에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가 문을 열었다. 학교는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고, 1912년 첫 졸업생 13명을 배출했다. 1910년에는 헤이스팅스 칼리지와 협의해 교정 안으로 학교를 옮겼다. 학교 운영은 김장호에게 맡기고, 박용만은 여러 지역에서 후원금을 모아 운영비를 보탰다.
펜으로 싸운 언론인
박용만은 군인이자 언론인이었다. 1911년 2월 그는 재미 한인 단체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제4대 주필이 되어 217호부터 252호까지 신문을 만들었다. 주필이 된 직후에는 형태 없는 정부, 곧 ‘가정부’가 필요하다고 몇 달 동안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여론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무렵 『국민개병설』(1911)과 『군인수지』(1912)를 썼다. 1913년 8월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주필을 맡았고, 신문 이름을 『국민보』로 바꿨다.
그 뒤로도 신문 일은 이어졌다. 1918년 호놀룰루에서 『태평양시사』를 창간해 주필을 맡았고, 1921년 베이징에서는 『대동』을 펴냈다. 1925년 7월에는 호놀룰루에서 열린 태평양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아메리카혁명』은 1915년에 한글로 번역해 출판했다.
하와이의 대조선국민군단
박용만은 1912년 12월 하와이에 먼저 도착했다. 1913년 2월에는 옥중 동지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박용만의 도움이 컸다. 박용만은 이승만이 105인 사건을 고발한 『한국교회 핍박』에 서문을 써 주었고, 이승만이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의 번역과 출간도 도왔다.
1913년 5월 박용만은 하와이 정부에서 특별경찰권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인국민회에 경찰부를 두어 한인 자치제를 세웠다. 같은 해 12월에는 호놀룰루 YMCA에서 한인 지도자들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그 사관학교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하와이 한인들의 후원은 대단했다. 1914년 4월 박종수는 자신의 모든 도지권을 군단에 넘겼고, 임응전·한태경·한치운 세 사람은 직접 일구던 파인애플 농장을 내놓았다. 박용만은 농장을 빌려 동포 청년들이 함께 농사를 짓게 했다.
1914년 6월 하와이 가훌루의 아후이마누 지역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이 창설되었다. 같은 해 8월 29일에는 사관학교 낙성식이 열렸다. 군단은 군사훈련을 통해 독립전쟁에 대비할 인원 130여 명을 확보했다. 박용만은 조직을 넓히는 일도 했다. 이주연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냈고, 장일환을 귀국시켰다. 1915년 3월 평양에서는 군단의 국내 지부 성격을 띤 비밀단체 조선국민회가 결성되었다. 그는 미국 내 유일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설립하려 노력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이승만과의 결별, 임시정부와의 거리
두 사람은 하와이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지만, 이승만이 무장투쟁론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1915년 박용만은 이승만이 운영하던 학교와 자신의 군사학교를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두 사람의 갈등과 안창호 계열과의 경쟁이 겹치면서 하와이와 미국의 한인 사회는 세 갈래로 나뉘었다. 1916년 10월에는 자금 문제를 둘러싼 이승만 측의 공격으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사실상 문을 닫았다.
박용만은 그사이에도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1917년 상하이의 신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고, 이 선언에는 임시정부 수립 계획이 담겼다. 같은 해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동맹회에도 참석했다. 1919년 3월에는 호놀룰루에서 대조선독립단을 만들고 『태평양시사』를 인수해 기관지로 삼았다. 4월에는 3·1운동 관련 문서를 엮은 영문 책자 『한국인의 봉기와 독립선언서 등에 대한 진실』을 펴냈다.
1919년 4월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박용만은 외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9월 상하이에서 여러 임시정부를 하나로 합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개편할 때도 외무총장에 뽑혔다. 그러나 그는 취임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방략을 두고 대통령 이승만과 생각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국제 외교에 무게를 둔 반면, 박용만은 독립군을 통합해 무력으로 독립을 이뤄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베이징에서 신채호, 신숙 등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는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를 결성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대회가 열리자 임시정부 불신임 운동에 앞장섰다.
생애 마지막 사업과 오늘의 평가
1926년 박용만은 베이징에 대본공사를 세웠다. 중국의 미개간지를 사들여 개간하고, 그곳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삼아 독립군 양성 자금을 마련하려는 사업이었다. 1927년 4월에는 호놀룰루 팔라마에 국어학교인 우성학교를 열었다. 교재로는 그가 직접 엮은 초등국어교과서를 썼다. 『조선말 독본』 1·2권도 이해에 나왔다. 1928년 10월 17일, 대본공사 일을 추진하던 그는 베이징에서 이해명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두고는 논란이 이어졌다. 의열단 측은 그가 변절해 일본의 밀정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밀정 노릇을 했다는 자료는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방법론을 두고 그와 다퉜던 이승만과 안창호도 그가 밀정에게 협력했을 리 없다고 했다. 반면 언론인 송건호는 그의 처신이 모호했다며 비판했다. 그의 암살은 당시 독립운동계가 얼마나 깊이 분열되어 있었는지 보여 주는 사례로 꼽힌다. 오랫동안 잊혔던 그의 행적은 1960년대 초부터 다시 발굴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95년에는 훈격을 높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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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박용만 (1881년)」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박용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