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시형, 동학 교단 재건과 삼경사상의 확립…한국사 인물

[조선] 최시형, 동학 교단 재건과 삼경사상의 확립…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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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1827년 3월 21일 경상도 경주에서 태어나 1863년 8월 14일 도통을 이어받았고, 1898년 6월 2일 서울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탄압 속에서 경전을 간행하고 육임제 등 조직을 정비했으며, 교조 신원운동과 동학농민운동 국면에서 북접을 이끌었다.

제지소 일꾼에서 동학의 계승자로

해월 최시형은 1827년 3월 21일 경상도 경주에서 최종수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초명은 최경상, 자는 경오였다. 그는 5세 때 어머니를 잃고 12세 때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17세부터 종이를 만드는 제지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19세에 밀양손씨와 혼인했다. 28세에는 포항시 신광면 마북리로 옮겨 농사를 지었으며, 마을 대표인 집강으로 뽑혀 6년 동안 소임을 맡았다. 이후 자신의 농토를 경작하려고 검곡으로 거처를 옮겼다.

1861년 6월 최시형은 동학을 믿기 시작했다. 한 달에 3, 4차례씩 먼 일족인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배운 내용을 실천하며 명상과 극기로 수련했다. 1863년에는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아 영덕과 영해를 비롯한 경상도 각지를 돌며 포교했고, 같은 해 7월 북도중주인에 임명된 뒤 8월 14일 도통을 이어받았다. 이로써 그는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되었다. 그는 1875년 이름을 최경상에서 최시형으로 바꾸었다.

탄압 속에서 다시 세운 교단

1863년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최시형은 대구에 숨어들어 옥바라지를 했다. 관헌의 체포망이 좁혀지자 태백산으로 피신했고, 평해와 울진 죽변리에 머물면서 자신의 가족과 최제우의 유족을 돌봤다. 1864년 최제우가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처형된 뒤에는 동학을 재건하기로 하고 교인들이 많이 살던 영양 용화동에 자리를 잡았다.

최시형은 용화동에서 해마다 4차례씩 49일 기도를 진행하고 스승의 제사를 위한 계를 조직해 흩어진 신도들을 모았다. 경전을 다시 베껴 쓰고 편집해 교인들이 읽도록 하면서 교단의 기반도 복구했다. 그러나 1871년 이필제가 최제우의 기일인 3월 10일 영해부에서 민란을 일으키면서 동학은 다시 탄압받았다. 최시형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평화적 포교를 원칙으로 삼아 이필제의 봉기를 반대하고 승산이 없다고 경고했지만, 봉기군은 패배했다.

관헌을 피해 소백산으로 들어간 최시형은 영월과 인제, 단양을 거치며 새로운 기반을 마련했다. 1878년에는 개접제를 만들었고, 1880년 5월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세워 『동경대전』을 펴냈다. 1881년에는 단양에 간행소를 두고 『용담유사』를 발간했다. 1884년에는 육임제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해 신도 조직과 교리 연구를 위한 체제를 정비했다. 교세가 커지자 1885년 충청도 보은군 장내리로 본거지를 옮겼다.

교조 신원과 종교의 자유를 요구한 합법 투쟁

동학에 대한 관헌의 수색과 탄압이 계속되자 최시형과 교인들은 1892년부터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교조 신원운동을 전개했다. 제1차 운동에서는 1892년 11월 전국의 신도들이 전주 삼례역에 모여 충청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교인 탄압 중지를 청원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893년 2월에는 박광호를 소두로 삼은 각 지역 대표 40여 명이 서울 광화문에서 고종에게 직접 상소하는 제2차 운동에 나섰다.

대표들은 궁궐 앞에서 사흘 밤낮 동안 호소했고, 고종이 해산을 조건으로 선처를 약속하자 물러났다. 그러나 탄압이 이어지자 최시형은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했다. 3월 10일 보은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를 집결시켜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부패한 관리의 처단을 요구하고 척왜양창의의 기치를 내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조정이 파견한 선무사 어윤중과 면담한 뒤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과 영장 윤영기 등 탐관이 파면되자 집회를 스스로 해산했다. 최시형은 이 과정에서 폭력 사건을 엄금했고, 무력 봉기를 권하는 신도들에게 시기상조라는 태도를 보이며 교세 확장에 집중했다.

동학농민운동과 북접의 선택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고부군청을 습격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자 최시형은 처음에는 무력 행동에 반대했다. 그가 이끈 북접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 포교의 자유를 우선했으며,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의 정치적·군사적 노선과 거리를 두었다. 최시형은 전봉준 등이 흥선대원군 등과 모의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대원군에게 이용당하리라고 주장했다.

신도들의 뜻에 따라 최시형은 4월 충청도 청산에 교인들을 모았다. 북접군은 회덕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지만 관군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우선 해산했다. 전봉준이 일본군의 상륙과 정부의 요구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음력 9월 다시 봉기하자 최시형도 북접 각지의 접주에게 총궐기를 명했다. 북접군은 논산에서 남접군과 합류해 관군·일본군 연합군과 공주에서 싸웠으나 크게 패했고, 논산과 장수 등지에서도 연이어 패전했다.

1894년 12월 말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뒤 최시형은 피신하면서도 포교를 계속했다. 1897년에는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8년 3월 원주에서 송경인의 밀고로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됐으며, 6월 2일 교수형을 당했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 제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이후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었다.

경전과 조직, 삼경사상으로 남은 유산

최시형은 탄압과 피신이 거듭되는 상황에서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고, 개접제와 육임제를 마련해 동학을 조직적인 종교 교단으로 정비했다. 그는 향아설위, 삼경설, 이심치심설, 이천식천설, 양천주설 등 자신의 신앙관도 펼쳤다. 그의 신관은 범신론적·내재적 경향을 띠어 하느님을 인간과 동일시하며, 나아가 만물과 동일시했다. 이런 신관에서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 사람을 공경하는 경인, 사물을 공경하는 경물의 삼경사상이 도출됐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기르는 일이 곧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라는 양천주의 가르침도 같은 맥락에서 나타났다.

최시형은 고아가 된 제지소 일꾼에서 출발해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되었다. 평화적 포교와 합법적 신원운동을 우선하면서 무력 봉기에는 반대하거나 시기상조라는 태도를 보였지만, 일본군이 개입한 급박한 상황에서는 북접을 이끌고 남접과 함께 싸우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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