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1807~1877)는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의 손자로 태어나 사헌부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우의정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관료다. 청나라 사행에서 양무운동을 살피고 자주적 개국과 서양 기술의 선택적 수용을 주장했으며,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운동의 선구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됐다. 1877년 수원부 유수로 재직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북학의 유산을 이어받은 학자
박규수는 1807년 서울에서 현령 박종채와 전주 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의 손자다. 처음 이름은 규학이었으나 30세에 규수로 바꾸었고, 자는 환경 또는 정경, 호는 환재와 환재거사 등을 썼다. 가세가 넉넉하지 않아 주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정리·이정관·유화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15세 무렵에는 조종영 같은 연장자 학자와 나이를 넘어 교유할 정도로 학문이 성장했다.
박규수는 젊어서 효명세자와 가까이 지내며 《주역》과 국정을 논했다. 효명세자는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해 박지원의 저술과 박규수 자신의 글을 올리게 했으며, 박규수는 《상고도설》 80권을 지어 바쳤다. 그러나 효명세자와 부모를 잇달아 잃은 뒤 20년간 칩거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이 시기에 《연암집》을 거듭 읽고 윤종의·남병철·김영작 등과 교류하며 북학과 유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그의 관심은 경전 안에 머물지 않았다. 청나라의 세계지도와 천문 자료를 참고해 세계지도인 혼평의와 천문지도인 간평의를 제작했고, 경기도 지도인 동진방략과 평안도 전도도 그렸다. 고전과 공부 방법을 다룬 《상고도회문의례》 16권을 비롯해 《환재집》·《환재수계》·《금유시집》·《장암시집》 등을 남겼다. 그림과 글씨도 많이 제작했으나 저서와 유물 상당수는 1950년 전쟁 중 소실됐다.
민란과 외침의 현장에서 쌓은 경륜
박규수는 1848년 증광시 병과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병조정랑과 용강현령을 거쳐 1850년 부안현감, 1851년 사헌부 장령, 1854년 동부승지와 경상좌도 암행어사를 지냈다. 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피고 탐관오리를 처벌한 기록도 남겼으며, 1858년에는 곡산부사로 부임했다.
1861년 연행사절의 부사로 청나라에 약 6개월간 머물렀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하고 청나라가 베이징 조약을 맺는 국제정세를 현장에서 살폈으며, 심병성 등 80여 명의 중국 문인과 교유했다. 귀국 후 성균관 대사성이 됐고, 외교문서를 맡아 청나라에 보내는 자문과 미국의 힐문 및 통상 요구에 대한 답장을 작성했다.
1862년 진주민란이 확대되자 안핵사로 파견됐다. 박규수는 지방관과 향반의 부패, 삼정의 문란이 백성의 고통과 민란으로 이어졌다고 보고했다. 세금 감면과 구휼을 요청했으며, 근본 대책을 논의할 기구를 건의해 삼정이정청 설치로 이어지게 했다. 이후 이조참의와 도승지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홍문관 제학·이조참판·한성부 판윤·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경복궁 중건 때에는 영건도감 제조로 실무를 맡았다.
1866년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 거부를 무시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박규수는 공격을 지휘했고, 좌초한 배에 불을 붙이는 화공으로 이를 격침했다. 같은 해 천주교 박해가 벌어졌지만 그는 백성이 천주교를 따르는 원인을 가혹한 행정과 교화의 실패에서 찾고 처벌보다 선도를 주장했다. 그의 관할 지역에서는 천주교 박해로 처형된 사람이 없었다. 세금을 덜고 흉년 피해 농가를 구제했으며, 선비들이 과거에 진출하도록 글을 가르쳐 1869년 4월까지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했다.
양무운동에서 찾은 자주적 개국
1872년 박규수는 진하사 정사로 두 번째 청나라 사행에 나섰다. 서장관 강문형과 역관 오경석을 대동했고,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던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살폈다. 이 경험을 거쳐 동양의 학문과 도덕을 지키면서 서양의 유용한 기술을 선택해 받아들이는 동도서기적 개화를 주장했다. 1873년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지만, 개국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874년 사직했다.
그의 개국론은 외세의 무력에 굴복하자는 주장이 아니었다. 일본의 접근에 대해서도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먼저 공격하지 않되 유사시에는 무력을 행사한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이 새 외교문서에 ‘황’·‘칙령’·‘대일본’ 같은 표현을 넣자 조선 조정은 문서 접수를 거부했다. 박규수는 호칭보다 실제 관계와 국익을 보아야 한다며 문구에 얽매이지 말고 서계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1875년에는 흥선대원군에게 “만약 저들이 포성을 한 번 발(發)하기에 이르면 이후 비록 서계를 받고자 하여도 이미 때가 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해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자 오경석 등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했고,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에 관여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일본의 무력적 협박 아래 체결된 불평등조약이었으며, 박규수의 자주적 개국 구상과 다른 방향으로 귀결됐다.
개화파를 길러낸 사랑방
정계 일선에서 물러난 박규수는 사랑방을 찾은 젊은이들에게 《연암집》과 《해국도지》를 강의하고 자명종·시계·기계·서양화와 국제정세를 소개했다. 김옥균·박영효·김홍집·김윤식·유길준·박정양·홍영식·서재필·윤치호 등 개화운동을 이끈 인물들이 그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았다. 신분보다 사람의 됨됨이를 중시해 오경석, 유대치, 승려 이동인과도 교유했다.
다만 그의 대외관을 일관된 주화론으로만 보는 해석에는 논란이 있다. 김명호 교수는 박규수가 흥선대원군의 양이 정책에 동조했고 신미양요 때 미국과의 교전을 주장했다는 점을 들어, 개국을 구상한 대표적 주화론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공직자로서 국가 시책을 수행하면서도 1872년 두 번째 청나라 방문 이후 개국의 확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고 설명한다.
실학과 개화를 잇는 이름
박규수는 1877년 수원부 유수로 재직하던 중 수원부 청사에서 사망했다. 1878년 문익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921년 고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그의 관작은 제자들의 갑신정변 실패 뒤 삭탈됐다가 1894년 복권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의 개화 사상을 실학의 근대지향적 측면을 이어받은 위에 외부 요인이 더해져 나타난, 북학파의 이용후생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운동의 선구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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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박규수」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박규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