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한복판에서 충돌한 두 정보기관
2일 새벽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국가보안국(SBU)과 국방부 정보총국(HUR) 산하 특수부대가 무장 대치 끝에 총격전을 벌여 HUR 특수부대원 3명이 다쳤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충돌은 1일 늦은 밤 시작돼 2일 새벽까지 이어졌으며, 현지 주민들이 소셜미디어에 공개한 영상에는 사건 현장인 아파트 건물 밖에 핏자국이 남은 모습도 담겼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국가의 수도에서 적이 아닌 자국 정보기관 소속 무장 병력끼리 총격을 주고받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현장 마찰로만 보기 어려운 사건이다.
SBU와 HUR은 모두 러시아 영토와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해온 핵심 기관이다. 두 기관은 러시아군 장교 암살을 비롯해 고도의 보안과 지휘 통제가 요구되는 임무를 담당해왔다. 이런 조직들이 키이우 도심에서 서로 총을 겨눈 것은 전시 정보 체계 내부의 경쟁이 공개적인 물리적 충돌로 번졌음을 보여준다. 전쟁 수행 능력은 전선의 병력과 무기뿐 아니라 정보기관 사이의 역할 분담, 책임 소재, 지휘 명령의 일관성에 좌우된다. 이번 사건이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충돌 장소가 군사시설이 아니라 HUR 산하 부대가 임차한 도심 아파트였다는 점도 파장을 키운다. 늦은 밤 수십 명의 무장 병력이 주거 단지에 집결했고 협의가 무산된 뒤 총격이 발생했다. 정보기관 간 갈등이 폐쇄된 조직 내부에 머물지 않고 민간인이 생활하는 공간까지 번졌다는 사실은 지휘·통제 실패의 위험성을 드러낸다. 구체적인 발포 경위와 책임 주체는 아직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두 조직이 현장에서 충돌을 막을 공통 절차를 작동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확인된다.
러시아인 지휘관 구금이 불붙인 대치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HUR 지휘 아래 우크라이나 편에서 싸우던 러시아 국적 전투원을 SBU가 구금한 일이었다. HUR 산하에는 수천 명의 숙련 병력으로 구성된 ‘티무르 특수부대’가 있으며, 이 부대에는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 편에서 싸우는 ‘러시아 의용군단’도 포함돼 있다. SBU는 지난달 말 러시아 의용군단 부지휘관 스테판 칼푸노프를 체포해 약 일주일 동안 구금했다. 그러나 칼푸노프에게 적용된 정확한 혐의는 총격전 이후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칼푸노프의 변호인이 설명한 당시 상황을 보면 두 기관의 인식은 처음부터 크게 엇갈렸다. SBU 특수부대 알파그룹은 1일 칼푸노프를 데리고 티무르 부대가 임차한 아파트를 찾아가 범죄 수사의 일환이라며 수색을 시도했다. 현장에 있던 티무르 부대원들은 이를 저지했고, 양측 협의가 결렬되자 티무르 지휘관이 추가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수사권을 집행하려는 SBU와 소속 전투원을 보호하려는 HUR 산하 부대가 같은 공간에 병력을 증원하면서 대치는 총격으로 확대됐다.
SBU는 러시아의 테러 행위를 수사하던 자국 요원들이 무장한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요원 보호를 위해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밝혔다. 반면 칼푸노프는 사건 뒤 풀려났다. 체포와 수색의 법적·정보적 근거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구금자가 석방된 결과는 사건을 둘러싼 의문을 더한다. 어느 쪽이 먼저 총격을 가했는지, 수색 과정에서 기관 간 사전 협조가 있었는지, 칼푸노프의 구금 사유가 무엇인지는 현재까지 제시된 정보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권한과 자원을 둘러싼 경쟁의 표면화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사건의 배경에 최근 더욱 격화한 SBU와 HUR의 주도권 경쟁이 있다고 전했다. 두 기관은 활동 영역이 일부 겹치는 데다 러시아 관련 비밀작전을 각각 수행하면서 영향력과 자원을 놓고 경쟁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평시라면 수사 관할이나 조직 간 조정 문제로 처리될 갈등이 전시에는 무장 인력과 비밀작전 조직의 충성 관계가 얽힌 훨씬 복잡한 문제로 바뀐다. 키이우 총격전은 그동안 외부에서 확인하기 어려웠던 긴장이 실제 병력 충돌로 드러난 사례로 분석된다.
HUR의 지도부 교체 이후에도 조직 내부의 충성 구도가 완전히 재편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한 배경으로 거론된다. HUR을 오랫동안 이끈 키릴로 부다노우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난 1월 올레흐 이바셴코가 새 HUR 수장이 됐다. 그러나 티무르 특수부대원 상당수는 여전히 부다노우에게 강한 충성심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공식 수장이 교체된 뒤에도 전임 지도자와 연결된 결속이 유지된다면, 명목상 지휘 체계와 현장에서 작동하는 충성 체계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충돌을 개인 간 다툼이나 우발적 오인만으로 축소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SBU가 특정 전투원을 체포하고 수색에 나선 행위는 수사 권한의 문제이고, HUR 산하 병력이 이를 막은 행위는 작전 조직의 독립성과 소속원 보호 문제로 연결된다. 여기에 전임 HUR 수장을 향한 특수부대의 충성까지 겹치면서 사건은 기관 간 권한, 인력, 자원, 지휘권 경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이러한 구조적 해석과 별개로 총격의 구체적 책임은 추가적인 사실 확인이 필요한 영역이다.
전시 국가의 내부 통제력에 던진 경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과 싸우는 동시에 러시아 영토와 점령지에서 여러 비밀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SBU와 HUR이 각각 축적한 작전 능력과 특수부대 자원은 전쟁 수행의 핵심 수단이다. 그러나 강력한 기관들이 공통 지휘 원칙보다 자체 판단과 조직 논리를 앞세우면 같은 자원이 내부 충돌의 위험으로 바뀔 수 있다. 특히 수천 명 규모의 숙련 병력을 거느린 부대와 국가 수사기관의 특수부대가 직접 맞서는 상황은 단일 사건을 넘어 전시 통제 체계의 취약성을 드러낸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사건 이후 칼푸노프가 석방됐지만 갈등의 원인이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혐의가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고 SBU와 HUR의 설명도 하나의 일관된 사건 경위로 정리되지 않았다. 향후 핵심은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만이 아니라 두 기관이 왜 협의에 실패했는지, 무장 병력의 증원을 누가 승인했는지, 지도부 교체 이후 HUR 산하 특수부대에 대한 실질적 지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책임 규명 없이 사건을 봉합하면 비슷한 충돌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키이우 총격전은 장기화한 전쟁에서 국가의 결속이 외부 전선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보기관은 성과가 공개되기 어렵고 조직별 작전 자율성이 큰 만큼, 상호 신뢰와 명확한 관할 조정이 무너지면 갈등이 뒤늦게 폭발할 수 있다. 세계 독자에게 이번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지속 능력이 군사 장비뿐 아니라 핵심 보안기관을 하나의 국가 지휘 체계 안에서 통제할 수 있는지에도 달려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