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채응언, 병탄 이후 중북부 항전을 이어간 마지막 의병장…한국사 인물

[대한제국] 채응언, 병탄 이후 중북부 항전을 이어간 마지막 의병장…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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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엇갈리는 출생과 의병 참여

채응언은 1883년에 태어나 1915년 11월 4일 순국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인천이며 채응원, 채응경, 채도석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가계와 어린 시절을 확인할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출생지도 함경남도 안변군 영풍사와 고원군 산곡면, 강원도 통천군 자산, 평안남도 순천 등으로 기록마다 다르다. 다만 체포 뒤 작성된 판결문에는 주소가 평안남도 성천군 능중면 고익리로 적혀 있어 실제 출신지는 성천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산 군인의 부교였다는 설과 가난한 농민이었다는 설도 함께 전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채응언은 1907년 음력 7월경 유인석 계열의 서태순 의병부대에 들어가 병력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동했다. 서태순이 전사한 뒤에는 직접 의병부대를 지휘했다. 1908년 봄 황해도에서 부대를 다시 편성했고, 진동본진분파대장 명의로 같은 해 5월 보국창의문을 발표했다.

황해도에서 시작된 무장 항일전

새로 정비한 부대는 1908년 황해도 안평의 순사주재소와 수안의 헌병분견소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이 보유한 근대식 총기를 여러 정 노획해 전투력을 보강했다. 채응언이 이끈 병력은 상황에 따라 수십 명에서 수백 명 규모였으며, 일본 군경과 헌병대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교전 지역은 넓어졌다. 1909년 8월부터 11월까지 강원도 이천군 방장면 구당리, 황해도 곡산군 이화동, 함경남도 안변군 영풍사 대송동에서 일본 군경 및 헌병대와 싸웠다. 채응언은 강두필 또는 강천돌 등 주변 의병부대와 힘을 합치기도 했다. 추적이 거세지면 병력을 10~15명 단위로 나눠 유격전을 벌였다.

병탄 이후에도 이어진 중북부 항전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뒤에도 채응언의 무장투쟁은 중단되지 않았다. 강원도 이천과 함경남도 안변, 평안남도 성천, 황해도 곡산을 오가며 항일전을 이어갔고, 활동지의 전주를 쓰러뜨려 통신시설을 파괴하기도 했다. 1910년 9월에는 강원도 이천군의 광북수비대를 공격했다. 1913년 6월에는 황해도 곡산군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해 헌병과 보조원을 처단했다.

1914년에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원 읍내에 나타났다. 당시 주요 거점은 황해도 곡산군 백년산이었으며, 황해도·함경남도·강원도·평안남도가 맞닿는 지역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일제는 같은 해 9월부터 평양헌병대장 오하시 중좌의 지휘 아래 수색반을 운용했다. 각 수색반은 헌병 상등병 1명과 보조원 4명으로 구성됐으며 모두 5개 반이 투입됐다. 11월에는 채응언에게 280원의 현상금도 걸었다.

체포와 사형

채응언은 1915년 7월 5일 평안남도 성천군 영천면 처인리에서 군자금을 모으다가 성천분대 요파출장소 헌병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뒤 일본 헌병 곁에서 맨발로 수갑을 찬 채 찍힌 사진도 남아 있다. 그는 평양으로 옮겨져 평양감옥에 수감됐다.

평양복심법원은 1915년 9월 21일 채응언에게 살인·강도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상고했지만 고등법원은 10월 28일 이를 기각했다. 확정된 형은 11월 4일 집행됐으며 채응언은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마지막 의병장이라는 평가

채응언은 1907년부터 체포된 1915년까지 한반도 중북부에서 항일전을 계속한 대한제국 마지막 의병장으로 평가된다. 그의 체포 뒤 국내 의병운동은 명맥이 거의 끊겼다. 이에 따라 그의 순국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부터 이어진 약 20년의 의병항쟁이 마감되고, 무장 항일투쟁의 중심 세력과 활동 무대가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여겨진다.

정부는 1962년 채응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병력을 작은 단위로 나누면서까지 추적을 피하고, 한국 병탄 뒤에도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가 오늘날까지 마지막 의병장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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