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박제가, 《북학의》로 상업과 기술의 부국을 구상한 북학파 실학자…한국사 인물

[조선] 박제가, 《북학의》로 상업과 기술의 부국을 구상한 북학파 실학자…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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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朴齊家)는 1750년 승지 박평과 전주 이씨 사이의 서자로 태어나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며 《북학의》를 통해 상공업 진흥과 해외 통상, 과학기술 수용을 주장한 조선 후기 실학자다.

서얼의 벽을 넘어 학문의 길로

박제가(朴齊家)는 1750년 조선에서 승지 박평과 전주 이씨 사이의 서자로 태어나 1805년에 세상을 떠난 실학자다. 본관은 밀양이며 자는 차수·재선·수기, 호는 초정·정유·위항도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와 글씨,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읽은 책을 여러 차례 베껴 쓰며 학문에 몰두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본가를 나와 어려운 생활을 했으며,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사회적 차별도 겪었다.

1766년 이관상의 서녀와 혼인한 박제가는 장인의 지원을 받아 성리학과 글을 배웠다. 19세를 전후해서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 북학파 지식인들과 교유했다. 특히 이덕무와 가까운 벗으로 지냈고 정약용과도 교류했다. 1776년에는 이덕무·유득공·이서구와 함께 사가시집인 《건연집》을 펴냈으며, 이 시집은 청나라에도 알려졌다. 그러나 1773년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려던 시도는 서얼이라는 이유로 좌절됐다.

청나라에서 발견한 개혁의 방향

박제가는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처음 청나라에 갔다. 현지에서 이조원·반정균 등의 학자들과 교류한 그는 귀국한 뒤 청나라에서 본 풍속과 제도를 정리해 《북학의》 내편과 외편을 저술했다. 내편에는 생활 도구와 시설을 개선할 방안을 담았고, 외편에서는 조선의 정치·사회 제도가 안고 있던 모순과 개혁책을 다뤘다. 그는 모두 네 차례 청나라를 방문하고 100명이 넘는 중국 지식인과 교유하며 국제적인 시야를 넓혔다.

박제가는 청나라를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과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문명국으로 보았다. 조선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북벌론을 현실성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하고, 청나라의 발전된 제도와 기술을 배워 빈곤을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폐쇄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리지어 비웃고, 또 덩달아 이를 업신여긴다. 좁은 소견으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엿보고, 틀에 박힌 안목으로 끝없는 변화를 논하곤 한다.”라고 지적했다.

규장각에서 펼친 실학과 개혁론

정조는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을 설치하고 박제가를 이덕무·유득공·서이수와 함께 등용했다. 서얼허통 정책으로 관직에 진출한 박제가는 이후 13년간 규장각 내외직에서 근무하며 소장 서적을 읽고 왕명에 따라 여러 책을 교정하고 간행했다. 전설서별제와 군기시정 등을 거쳤으며, 1794년 2월 춘당대 무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오위장을 지냈다. 양평현감·영평현령·부여현감 등의 지방관도 역임했다.

1786년 박제가는 정조가 관리들에게 구폐책을 요구하자 신분 차별 철폐, 상공업 진흥, 해외 통상, 과학기술 교육, 서양인 선교사의 초빙을 아우르는 개혁안을 올렸다. 재능 있는 서얼과 낮은 신분의 인물을 실제 능력에 따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과거라는 이름 아래 문벌과 관직이 세습되는 현실도 비판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대 지배층의 이해와 충돌했고 노론 벽파의 반발을 불렀다.

박제가는 틀에 박힌 문장보다 현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는 글쓰기를 중시했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시다. 사계절의 변화와 온갖 만물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 몸짓과 빛깔, 그리고 음절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하고 있다.”라고 썼다. 정조의 문체반정 과정에서는 비속한 문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자송문》을 제출했지만, 제목과 달리 자신의 문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상업과 기술로 구상한 부국의 길

《북학의》에서 박제가는 무조건적인 절약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을 비판했다. 소비가 생산을 자극하며 상업이 성장하면 수공업과 농업도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화폐 유통을 확대하고 질 낮은 화폐의 주조를 막으며, 수레가 다닐 길을 만들고 선박 이용을 늘려 국내 유통과 해외 무역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인과 무역상에 대한 천대를 줄이고 밀무역을 정상적인 교역으로 전환하며, 개성·인천과 충청도·전라도의 여러 강가 지역에 무역항을 열자는 구상도 제시했다.

그는 중국 남부와 산둥 지방으로 통상을 넓힌 뒤 국력이 성장하면 일본·안남·위구르 등으로 교역 상대를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서양인을 조선에 초빙해 천문 관측, 농잠, 의약, 성곽과 다리 건설, 광물 채굴, 유리 제작, 화포 설치, 수레 운용과 선박 건조 기술을 배우자는 주장도 폈다. 농업 역시 홀로 발전할 수 없다고 보고 시장·수공업·교통의 발전과 농기구 및 경작법의 개량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대부도 농업과 노동, 상업 활동에 참여해 일하지 않는 인력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제가는 조선의 빈곤을 청빈이라는 말로 미화하지 않았다. 《북학의》에는 “열 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하루 두 끼를 해결하는 자가 몇 집 되지 않는다”는 현실 인식이 담겼다. 그는 가난을 도덕적으로 고결한 상태가 아니라 사람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환경으로 보았으며, 국부를 키워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는 일을 학문의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예술가이자 북학파의 선구자

박제가는 시뿐 아니라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대련 형식을 조선에 수용했고, 예서와 해서·행서·초서를 구사했다. 그의 서풍은 훗날 추사체 형성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김정희도 그의 문하에서 글과 그림을 배웠다. 산수화와 인물화뿐 아니라 꿩·물고기 등을 생동감 있게 그렸으며, 《목우도》·《의암관수도》·《어락도》·《야치도》와 대련 글씨가 작품으로 전한다. 저서로는 《북학의》·《정유집》·《정유시고》·《명농초고》 등이 있다.

1801년 네 번째 청나라 사행에서 돌아온 박제가는 사돈 윤가기의 흉서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종성에 유배됐다. 1805년 풀려난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업과 무역을 천시하던 사대부 사회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정조 사후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뜻을 펼칠 기회도 잃었다. 그럼에도 학문이 실제 생활과 국방, 국가 경영에 쓰여야 한다고 보았고 외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여 모든 사람이 더 나은 삶을 누릴 방안을 찾았다는 점에서 북학파 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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