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박차정,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을 이끈 여성 독립전사…한국사 인물

[독립운동가] 박차정,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을 이끈 여성 독립전사…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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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이던 오늘날의 부산에서 태어나 일신여학교의 항일학생운동과 근우회 여성운동을 이끈 뒤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부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35세로 생을 마쳤다.

항일 의식을 키운 부산 동래의 소녀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이던 오늘날의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침탈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어머니 김맹련은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김두봉과 독립운동가 김약수의 친척이었다. 숙부 박일형과 오빠 박문희·박문호도 항일운동에 참여한 집안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박차정은 1924년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했다.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에 다니면서 항일학생운동과 동맹휴학을 이끌었고,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체포와 구금을 겪었다. 교지 『일신』 2집에는 그의 항일 의식이 드러난 소설 「철야」가 실렸다.

학교를 나온 뒤에는 동래청년회 부녀부장을 2년 동안 맡았다. 1927년에는 근우회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그의 저작으로는 소설 「철야」 외에도 시 「개구리 소래」와 일본어 수필 「가을 아침」이 전한다.

근우회 지도자로 나선 여성운동가

박차정은 경성으로 올라가 여성의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1929년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된 뒤 선전조직과 출판 업무를 담당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민족독립을 함께 추구하는 활동의 중심에 선 것이다.

1930년 1월에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해 서울의 11개 여자학교 학생들이 벌인 시위의 막후 활동을 이끌었다. 그는 노동자 파업과 후속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박차정은 학생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여성단체의 조직과 출판 활동까지 맡으며 항일운동의 범위를 넓혔다. 국내에서 거듭된 체포를 겪은 그는 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1930년 봄 배편으로 망명했다.

중국 망명과 의열단 활동

중국에 도착한 박차정은 국내에서 쌓은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과 의열단 간부로 선임됐다. 북경 화북대학을 졸업했으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레닌주의 정치학교 운영에도 참여했다. 이 시기 그는 임철애와 임철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그는 안광천의 소개로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을 만났고 1931년 결혼했다. 김원봉의 두 번째 부인이 된 뒤에는 의열단의 핵심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박차정은 1932년 난징으로 옮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부 교관을 맡았다. 이 학교에서 여성 교육생을 대상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며 독립운동 인력을 길러냈다. 가명으로 활동한 그는 교관이자 지휘관으로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과 무장투쟁

박차정은 1935년 민족혁명당의 지원단체인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해 여성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다. 민족혁명당에서는 부녀부 주임을 맡았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에도 관여했으며, 중일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글과 방송을 통해 일본의 침략전쟁을 규탄하고 조선 여성들의 단결과 투쟁을 촉구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한중 연합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자 박차정은 1938년 부녀복무단장이 됐다. 부녀복무단은 조선의용대에서 여군에 해당하는 조직이었다. 그는 조직과 교육을 넘어 일본군을 상대로 한 무장투쟁에도 직접 나섰다.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박차정은 일본군과 교전하다 부상을 입었다. 이후 총상의 후유증과 지병인 관절염에 시달렸다. 병세를 이기지 못한 그는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35세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뒤늦게 되찾은 독립운동의 이름

중국의 이종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소앙은 박차정을 의열단의 내조자이자 항일전사로 기리는 추도사를 중국 신문에 실었다. 그의 유해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국내로 돌아왔다. 이후 남편 김원봉의 선영이 있는 경상남도 밀양에 안장됐다.

박차정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김원봉도 월북해 북한에서 장관급 각료를 지냈기 때문에 오랫동안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정부는 1995년 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부산 동래구에는 생가가 복원됐고 부산 금정구에는 동상이 세워졌다.

박차정은 일신여학교의 학생운동에서 출발해 근우회의 여성운동, 의열단의 항일활동, 군사학교의 교육, 조선의용대의 무장투쟁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 독립운동가다. 특히 부녀복무단장으로서 여성도 독립전쟁의 조직자이자 전투 주체였음을 자신의 생애로 보여줬다. 오늘날 그가 기억되는 까닭은 글과 교육, 조직과 무장투쟁을 함께 이어가며 민족독립을 위해 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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