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우덕순, 안중근과 하얼빈 의거를 함께 준비한 독립운동가…한국사 인물

[대한제국] 우덕순, 안중근과 하얼빈 의거를 함께 준비한 독립운동가…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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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덕순(禹德淳)은 1880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로, 안중근과 함께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계획했다. 하얼빈 의거 뒤 붙잡혀 뤼순에서 재판을 받았고, 1910년 2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나, 2019년 KBS가 방송한 「밀정」이 그를 밀정이라고 주장하면서 만주 행적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충북 제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청년

우덕순(禹德淳)은 1880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단운(檀雲)이고, 우연준(禹連俊)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으려 싸운 독립운동가이며, 광복 뒤에는 정치에도 참여했다. 무엇보다 안중근과 함께 하얼빈 의거를 준비한 동지로 기억된다.

젊은 시절 우덕순은 동대문 근처에서 잡화 가게를 꾸렸다. 독립협회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04년에는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담배를 팔며 생계를 이었다. 그곳에서 안중근, 이범윤(李範允)과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범윤은 북간도관리사(北間島管理使)를 지낸 독립운동 지도자다. 우덕순은 현지에서 나오던 신문 『대동공보(大東公報)』의 모금을 맡으면서 나라 안팎의 정세를 알게 됐다. 동지들에게서 돈을 지원받아 러시아에 학교를 세우고 청년들을 가르쳤고, 이범윤 등과 연락하며 의병을 꾸려 일본과 싸울 준비를 했다.

의병 전투와 단지동맹

1908년 여름 우덕순은 의병대 참모총장이던 안중근과 두만강을 건넜다. 이들은 함경도 경흥과 회령 일대에 있던 일본 군영을 습격해 일본 병사를 사살하고 무기를 빼앗았다.

이듬해인 1909년 봄 그는 다시 러시아로 갔다. 그리고 노령 연추(煙秋)에서 안중근, 김기열(金基烈) 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다. 목숨을 걸고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맹세였다. 이 무렵 그는 이름을 연준(連俊)으로 바꿨다. 담배 행상으로 활동 자금을 모으고, 러시아 곳곳을 돌며 흩어진 동지들을 서로 이어 주었다.

하얼빈 의거, 채가구역을 맡다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를 지켜본 우덕순은 안중근, 조도선(曺道先)과 함께 이토를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1909년 10월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을 만나 이토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들었고, 함께 나서기로 약속했다. 가는 길에 유동하(劉東夏)와 조도선이 합류했고, 일행은 만주 하얼빈에 도착해 이토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거사를 반드시 성공시키려고 하얼빈 일대를 나눠 맡았다. 이토가 어느 쪽에 나타나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처단한다는 계획이었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을, 우덕순은 채가구역(蔡家溝)을 맡았다. 10월 26일 아침 이토 일행을 태운 열차는 채가구역을 통과해 하얼빈역에 섰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곳에서 안중근의 총에 쓰러졌다.

의거 직후 우덕순도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경찰 검문에 걸려 붙잡혔다. 안중근의 공범으로 지목돼 러시아 헌병대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에 넘겨졌고, 만주 뤼순에서 안중근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1910년 2월 그는 징역 3년형을 받았다. 뒤에 함흥 감옥 탈옥 사건이 드러나 형기가 2년 늘었고, 1915년에야 풀려났다.

출옥 이후 만주 활동과 광복, 그리고 죽음

감옥에서 나온 우덕순은 다시 하얼빈, 치치하얼, 만저우리(滿洲里) 등 만주 지역에서 교육과 종교 사업을 했다. 전로한족중앙회, 그리고 의열단 계열인 판의단 등에서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김명봉(金鳴鳳) 등과 함께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광복 뒤에는 흑룡강성(黑龍江省)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을 맡았다.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피난민이 된 동포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수송을 도왔다. 그 뒤 자신도 귀국해 대한국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26일 조선인민군에게 살해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19년 밀정 의혹과 반론

20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KBS 탐사보도부는 독립운동가를 감시한 밀정을 8개월 동안 추적했다. 취재진은 일본 외무성·방위성 기밀문서와 중국 당국 공문서 등 5만 장의 문서를 분석해 밀정 혐의자 895명의 실명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8월 13일과 20일 KBS1TV에서 방송된 2부작 「밀정」은 우덕순도 그 가운데 한 명이라고 주장했다. 근거는 그가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지에서 조선인민회의 주요 간부, 곧 회장으로 활동했다는 일본 측 문서였다.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한국인 사회를 통제하고 정보를 모으려고 만든 친일단체다. 취재진은 우덕순이 일제 정보기관인 특무기관과 가까웠음을 보여 주는 자료도 확보했다고 밝혔다. 원광대 김주용 교수는 “조선인민회가 활용하는 밀정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 정보가 조선인민회장을 했던 우덕순에게 집중됐다”고 주장했다. 국가보훈처는 KBS의 질의에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전반을 조사 중”이라고만 답했다.

KBS 탐사보도부 기자는 인터뷰에서 우덕순이 조선인민회 하얼빈 지회장을 했고, 조선인민회는 2009년 정부가 발간한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보고서에서 정보 수집 기능이 본질인 노골적인 친일 단체로 규정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단체의 지회장이 이중 밀정일 가능성은 제로라고 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에 만든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는 우덕순을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 있다”고 적고, 주의해야 할 인물로 올렸다. 그가 1925년 4월 30일 일본총영사관에서 6,175엔을 받았다는 기록은 방송보다 훨씬 앞서 발굴됐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인 신운용 박사는 2010년에 친일 가능성을 제기했다가, 일제 문헌을 연구하면서 그 의견을 거둬들였다. 당시 언론 내용을 보면 우덕순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치치하얼 감옥에 갇혀 있다고 나온다. 또 그는 만주에서 돌아온 한인들로 꾸려진 동삼성한인협력회의 회장을 맡았는데, 이를 두고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규탄한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 박사는 이런 사실에 근거해 논문에서 “이는 그가 친일로 경도되었다고 볼 수 없는 증거”라고 결론지었다.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만으로 친일로 볼 수 있느냐도 논란거리다. 정부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부록에는 조선인민회 회장이 141명 이상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회장 경력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기준을 충족한 사람은 6명뿐이다. 이 보고서는 조선인민회 회장을 밀정으로 분류하지도 않는다. KBS는 우덕순 논문을 게재한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측에는 따로 문의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1920년대 이후 만주 행적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영화와 무대 속 우덕순

하얼빈 의거를 다룬 작품에는 우덕순이 나온다. 영화 「도마 안중근」(2004년)에서는 강현중이, 「하얼빈」(2024년)에서는 박정민이 그를 연기했다. 뮤지컬 「영웅」에서는 2009~2011년 문성혁, 2012·2014년 황만익, 2015·2017년 정의욱이 우덕순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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