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허위, 13도 창의군과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이끈 항일 의병장…한국사 인물

[대한제국] 허위, 13도 창의군과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이끈 항일 의병장…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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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는 대한제국 말기 을미의병과 13도 창의군,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이끌며 항일 투쟁을 벌인 의병장이다. 1908년 6월 11일 경기도 양평의 산골 마을 유동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힌 그는 같은 해 10월 21일 쉰한 살의 나이로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다.

선산에서 태어나 을미의병을 일으키다

허위는 1855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허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호는 왕산이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하며 자란 그는 마흔한 살이 되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 의병에 나섰다. 이듬해인 1896년 2월 이기찬,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아 이기찬을 대장으로 세우고 김천과 성주를 거점 삼아 대구부까지 진격할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대구의 관군이 급히 출동하고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과 공주 관군까지 가세해 의병을 공격하면서 성주가 무너지고 이은찬을 비롯한 장수 일부가 붙잡히고 말았다. 흩어진 군사를 다시 모아 반격을 준비하던 허위는 고종이 몰래 내린 해산 명령을 받아들여 스스로 의진을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한동안 청송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했다.

대한제국 관직에 오르고 항일 격문을 뿌리다

허위는 1899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원구단 참봉으로 다시 관계에 나섰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1904년에는 중추원 의관,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등을 두루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비서원 승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그는 이상천, 박규병 등과 함께 일본을 배격하는 통문을 뿌리며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에 맞섰고, 일본의 국정 간섭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한 혐의로 최익현, 김학진과 함께 붙잡혀 넉 달간 갇혔다가 풀려났다. 석방 뒤 일본 쪽에서 칙임관 2등 벼슬을 내려 회유하려 했으나 허위는 이를 거절하고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 김천 지례에 은거했다.

13도 창의군을 이끌고 서울로 향하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허위는 경기도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전국 각지의 의병이 양주에 모인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1만여 명에 이르는 의병이 집결해 13도 창의군을 꾸렸고, 이인영이 총대장을 맡은 가운데 허위는 군사장 겸 경기대장을 맡았다.

연합 의병은 서울의 통감부를 치기 위해 진군에 나섰고 허위는 정예 300명을 이끄는 선발대로 서울 동대문 밖 삼십 리 지점까지 나아가 본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후속 부대와 연락이 끊긴 사이 일본군이 각지에서 밀려오던 의병을 하나씩 공격했고, 지원군 없이 일본군과 교전한 허위의 부대는 결국 연천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문경으로 돌아가면서 허위에게 뒷일을 맡겼다.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결성해 유격전을 벌이다

허위는 조인환, 권준, 박종한, 김수민, 김응두, 이은찬 등이 이끌던 의병부대와 손잡고 임진강 일대에서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새로 편성하고 총대장을 맡았다. 그는 의병의 군율을 엄격히 세워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했고, 필요한 군수물자는 군표를 발행해 조달하는 한편 부대를 잘게 나눠 일본군을 치는 유격전술을 택했다. 1908년 2월에는 가평과 적성 일대에서 의병 5천 명을 모아 훈련시키고 무기까지 만들었으며, 4월에는 이강년 등과 함께 전국 의병부대에 통문을 돌렸고 5월에는 박노천, 이기학을 시켜 서른 개 조항에 이르는 한국민의 요구 사항을 통감부에 제출하게 했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관찰사나 내부대신 자리를 주겠다며 여러 차례 회유해왔지만 허위는 이를 꾸짖어 돌려보내고 이강년,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강경파로 남았다.

체포와 순국, 그리고 가문의 희생

새로운 항일전을 준비하던 허위는 1908년 6월 11일 경기도 양평의 산골 마을 유동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그는 서대문감옥에 갇혔다가 같은 해 10월 21일 쉰한 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허위의 4형제 가운데 맏형 허훈은 논밭 3천 두락을 팔아 아우의 항일 자금을 댔고 셋째 형 허겸은 허위 휘하에서 함께 의병 활동을 했다. 허위가 세상을 떠난 뒤 선산에서 지내기 어려워진 집안은 허겸이 허위의 4남 2녀를 데리고 1912년 서간도로 망명하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사촌들도 그 뒤를 따랐다. 종질 허형식을 비롯한 후손 다수가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가족들은 해외 각지에 흩어져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왕산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오늘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허위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서울 동대문구를 지나는 왕산로는 그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고 구미시에는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의 삶은 드라마 제중원에서 배우 손현주가, KBS1 대구총국의 다큐멘터리에서는 배우 지승현이 연기하며 오늘날까지 되짚어지고 있다.

성균관 박사에서 평리원 재판장에 이르는 관직을 두루 거치고도 나라가 기울자 붓 대신 총을 들었던 허위는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과 임진강의병연합부대의 항전을 이끌며 대한제국 말기 의병 투쟁을 대표하는 인물로 남았다. 회유를 뿌리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의 선택과 이후 흩어진 후손들의 삶은 오늘날에도 독립운동가 예우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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