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세운, 20만 고려군을 이끈 개경 수복의 총병관…한국사 인물

[고려] 정세운, 20만 고려군을 이끈 개경 수복의 총병관…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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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장군 정세운은 광주(光州)를 본관으로 하며, 지금의 전남 장흥·보성군 일대로 보이는 장택현 출신이다. 그는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총병관으로 20만 대군을 지휘해 개경을 되찾았으나, 승리 직후인 1362년 자신의 공을 시기한 김용의 음모로 부하 장수들에게 살해됐다.

원 숙위와 초기 관직

정세운은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숙위하던 시절부터 곁에서 시종했고, 공민왕이 즉위한 뒤에는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1등 공신에 올랐다. 공민왕 원년인 1352년에는 종3품 대호군에 임명됐으며, 연저수종 1등공신으로 정3품 군부판서를 지냈다.

1354년에는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남정군에 편성돼 최영·이방실·안우 등과 함께 장사성 토벌에 나서 강소성 일대 고울부 전투를 치렀고, 이듬해 고려로 돌아왔다. 기철을 처단한 공으로는 홍언박·경천흥과 함께 다시 1등 공신에 책봉됐고, 1358년에는 종2품 지문하성사에 올랐다.

홍건적 방어와 서북면에서의 활약

1359년 11월 홍건적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자 정세운은 이듬해 정월 서북면도순찰사에 임명됐다. 그는 황주에서 돌아와 “적이 서경에 들어가서 나무를 쌓고 성을 수선하고 나와 핍박할 계획이 없으니 원컨대 놀라 요동하지 말게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케 하소서”라고 보고했고, 전공을 세운 군졸들에게는 금·은·패면 등을 차등 있게 나눠줬다.

참지정사가 된 뒤에는 왜구가 양광도를 침략해 개경에 계엄이 내려지고 백관에게 종군령이 떨어졌을 때, 간관까지 왕궁에 나와 하직하려 하자 “간관이 종군함은 옛적에 듣지 못한 바이라 나라 체모에 어찌 하리요”라고 말려 간관을 종군에서 제외시켰다.

1361년 11월 홍건적이 10여만 명 규모로 다시 침입하자 정세운은 서북면군용체찰사로서 절령의 방어 시설을 지켰다. 그러나 방어선이 무너지고 개경까지 함락되자 공민왕은 복주로 남행했으며, 정세운도 추밀 겸 응양군상장군으로서 왕을 호종했다.

총병관 임명과 개경 탈환

충성스럽고 청백한 성품으로 밤낮 적개심을 품고 나라를 되찾는 일을 자임하던 정세운에게, 공민왕은 총병관 자리를 맡기며 절월을 내리고 명령을 어기는 군사는 군법으로 다스리게 했다. 정세운은 도당에서 “나는 심히 한미한 사람이라 나와 같은 사람이 재상이 되었으니 나라가 어지러워짐은 당연한 일이나…”라며 군율 문란을 질타했고, 유숙에게 “내가 내일에는 군사를 낼 것이니 그대는 가서 군사를 정검 하라…”고 지시했다. 유숙이 “모든 군사가 이미 죽령 대원에 이르렀다”고 답하자 정세운은 “군사가 만약 기일을 어기면 그대도 또한 죄책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했으며, 김용에게는 “만약 적을 멸하지 못하면 비록 산골에 도망하여 숨더라도 어찌 살 수 있을 것이며 나라를 구할 수 있으리오”라고 말했다.

수시중 이암은 “공이 먼저 대의를 선창하여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나가니 사직이 다시 안정됨과 왕업의 중흥함은 이 일거에 있음이라 오직 공은 힘쓸지어다”라며 정세운을 독려했다. 정세운은 곧 중서평장사에 제수됐고, 공민왕이 오달적과 권천우를 보내 의주를 내리자 “제장이 적을 잡았다고 보고하더라도 먼저 상을 의논하시지 말며 신이 비록 적을 잡더라도 감히 자주 보고하여 역기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크게 이긴 후에 장계를 갖추어 들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서경 사람 고경이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백성이 대략 1만 명에 이른다고 알려오자 정세운은 예부상서 이순을 보내 이들을 구휼하게 하고, 제장들에게는 개경으로 진군하라고 독촉했다. 1362년 정세운은 이방실·김득배·안우·이성계·최영·안우경 등을 지휘해 20만 대군으로 개경을 포위했고, 자신은 도솔원에 주둔하며 적을 평정했다.

정세운은 대장군 김한귀와 중랑장 김경을 행재소로 보내 승전을 알리면서, 강적을 물리친 성과를 자신의 공이 아니라 공민왕의 덕택으로 돌렸다. 공민왕은 기뻐하며 김한귀에게 황금 25량과 비단 2필을, 김경에게 포 2필을 내렸고, 정세운과 태후·공주에게도 의복과 술을 보냈다.

승리 직후의 죽음과 사후 추모

그러나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김용은 왕명을 사칭해 안우·이방실·김득배를 부추겨 정세운을 살해하게 했다. 홍언박은 이 소식을 듣고 “총병이 군사를 낼 때에 말과 용모가 심히 거만하였으니 그 화를 당함이 마땅하다”고 평했다.

공민왕은 총병관이 자신을 대신해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인데 부하들이 마음대로 목숨을 빼앗은 것은 왕을 업신여긴 죄라고 규정하고, 1362년 음력 3월 1일 도원수 안우와 원수 김득배·이방실·민환·김림 등을 처단하도록 명했다. 다만 이들의 지난 전공을 고려해 처자에게까지는 죄를 묻지 않았으며, 정세운을 직접 해친 낭장 정찬은 도피 중이라 용서하지 않되 사정을 알고도 자수하지 않은 나머지는 용서한다고 밝혔다. 김득배는 산양현에서 붙잡혀 상주에서 효수됐으며, 이때 안우와 이방실도 함께 효수됐다는 기록도 있다.

공민왕은 정세운에게 종1품 첨의정승을 추증하고 예를 갖춰 장사 지냈으며, 복주 피란길의 호종 공과 총병관으로서 개경을 되찾은 공을 함께 추록해 그를 1등 공신으로 삼고 공신의 초상을 벽에 그리는 벽상도형으로 예우했다. 정세운은 2018년 9월 전쟁기념관에서 호국인물로 선정됐으며, 그의 생애는 KBS 드라마 《개국》과 MBC 드라마 《신돈》에도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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