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1860년 8월 11일~1935년 8월 1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였다. 유학자 집안에서 자라 춘천 의병장 유홍석의 며느리가 됐고, 의병가를 지어 항일의식을 일깨우며 의병운동을 후방에서 지원했다. 만주로 망명한 뒤에도 항일운동가를 길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의병 집안에서 품은 구국의 뜻
윤희순은 1860년 8월 11일 음력 6월 25일 윤익상과 덕수 장씨의 큰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며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했다. 출생지는 기록에 따라 서울 또는 경기도 양주군 구지면으로 전한다. 16세가 된 1876년 고흥유씨 유제원과 혼인하면서 춘천 의병장 유홍석의 며느리이자 유중교의 증손부가 됐다. 유제원은 팔도창의대장 유인석의 조카이기도 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을 받아 의병운동에 뜻을 두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이어지자 유홍석은 춘천 유림인 유중악·유중락 등과 함께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이 춘천과 가평에서 작전을 벌이는 동안 윤희순은 「안사람의 의병가」와 「병정의 노래」를 비롯한 의병가 수십 수를 만들었다. 노래로 항일의식을 일깨우고 의병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여성도 나라를 구하는 활동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래와 생활 지원으로 지킨 춘천의병
춘천의병은 무기에서 열세를 보였고, 유홍석은 유인석이 이끈 제천의병에 합류했다. 유홍석이 유인석과 요동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윤희순은 마을 여성들과 다른 지역에서 온 의병을 돌봤다.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는 등 의병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가 퇴위했으며 한국군대까지 해산되자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같은 해 8월 유홍석은 유중악·유영석·유봉석·박화지 등과 의병 600명을 이끌고 가평 주길리 일대에서 싸웠다. 의병자금과 탄약, 군량이 부족해지자 윤희순은 향민에게서 군자금을 모았다. 가정리 여의내골 주산에서 놋쇠와 구리를 사들여 무기와 탄환을 만들어 보냈으며, 탄환과 유황 등을 이용해 화승총용 화약을 제작하는 탄약 제조소도 운영했다.
윤희순은 여자 의병 30여 명도 모았다. 이들은 의병을 지원하거나 훈련에 참여했고, 윤희순 역시 의병가를 부르게 하며 훈련을 북돋웠다. 윤희순이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후방에서 의병을 적극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쏟았다. 관군과 일본군을 도운 밀고자를 꾸짖었으며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다. 이 작품들은 최초의 한글 의병가이자 민족 저항 시가이다.
만주에서 이어간 항일 인재 양성
1910년 국치를 맞은 뒤 유홍석은 일본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며 만주로 향했다. 윤희순 가족도 1911년 그를 따라 만주로 들어가 의병을 다시 일으킬 길을 찾았다. 1912년 초 환인현으로 옮긴 윤희순은 무논을 개간해 벼농사를 지으며 군자금을 모았다. 항일 인재를 키우기 위해 노학당을 세웠고 김경도와 박종수 등 항일운동가 50여 명을 양성했다. 중국인과 한국인에게 항일애국 노래도 가르쳤다.
망명지에서는 가족의 죽음이 이어졌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1913년 12월 세상을 떠났고, 유인석은 1915년 1월 사망했다. 남편 유제원도 같은 해 10월 회인현에서 숨졌다.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이 문을 닫자 윤희순은 무순 포가둔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중국인들과 힘을 모아 조선독립단을 만들었으며 1926년에는 조선독립단 가족부대와 조선독립단 학교를 세웠다. 신빈 영릉에는 학교 분교를 두었고 자신도 의병 훈련에 참여했다.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서 투쟁한 두 아들 유돈상과 유민상을 비롯한 자손에게도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맏아들 유돈상은 장인 음성국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한 끝에 1935년 7월 19일 순국했다. 윤희순은 1932년 무순에서 항일운동을 추진하다 계획이 미리 드러나 실패한 뒤에도 봉성현 석성 등으로 근거지를 옮기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만주에서 마친 생애와 남은 기록
윤희순은 자손을 훈계하는 글과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글을 남긴 뒤 1935년 8월 1일 향년 76세로 만주 해성현 묘관둔에서 생을 마쳤다. 시신은 묘관둔 북산에 묻혔으며 아직 고향으로 옮겨 안장되지 못했다.
그의 활동을 기려 1982년 11월 9일 강원대학교가 항골마을에 「해주윤씨의적비」를 세웠다. 1983년 8월 3일 대통령표창이 수여됐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윤희순이 남긴 자료는 「윤희순 의병가사집」으로 전하며 등록문화재 제750호가 됐다.
한국 최초 여성 의병 지도자의 의미
윤희순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였던 독립운동가다. 그는 의병가를 만들어 저항의 뜻을 전하고, 마을 여성들과 여자 의병을 모으며, 군자금과 무기를 마련했다. 만주 망명 뒤에는 농사를 통해 군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세워 항일운동가를 길렀다. 직접 의병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춘천의병 지원에서 조선독립단 학교 운영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식으로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윤희순을 그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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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윤희순」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윤희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