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편강렬, 의성단 무장투쟁과 독립운동 세력 통합…한국사 인물

[독립운동가] 편강렬, 의성단 무장투쟁과 독립운동 세력 통합…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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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편강렬(1892년 2월 28일~1929년 1월 16일)은 1907년 이강년의 의병부대에서 선봉장 겸 소모장으로 항일전에 나섰고, 1923년 만주에서 의성단을 조직해 단장을 맡았다. 1925년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조직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병 선봉장으로 나선 황해도 청년

편강렬은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편상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애사다. 한학을 공부한 그는 싸우는 소 두 마리 사이에 들어가 떼어놓을 만큼 힘이 세고 용맹하며 강직했다고 전해진다.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과 침략받은 민족의 고통을 들은 뒤에는 식사를 거르며 고민하다가 “왜놈들을 자기들 섬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편강렬은 1907년 부모의 허락을 받고 이강년의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이강년은 그를 선봉장 겸 소모장으로 발탁했으며, 편강렬은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항일전에 참여했다. 1908년에는 서울 진공작전을 위해 휘하 의병을 이끌고 동해안과 강릉을 거쳐 경기도 양주에 도착했다. 이곳에 집결한 의병들은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에 맞서 싸웠으나 패했고, 편강렬도 여러 곳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태백산 본진으로 돌아가 재기를 기다리다가 이듬해 봄 큰형 편수열의 권유로 귀가했다.

투옥에도 멈추지 않은 국권회복운동

편강렬은 1910년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인 숭실학교에 다니며 비밀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했다. 출옥한 뒤에는 영남에서 동지를 모으고 박상진 등이 조직한 광복단에 가담했다. 선친이 경영하던 양진의숙에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가르쳤으며, 안창호·양기탁 등과 신민회에서도 활동했다. 신민회는 상하 조직만 연결하고 같은 단계의 구성원끼리는 서로를 알 수 없게 운영한 비밀결사였다.

1919년 3·1운동 때 편강렬은 황해도에서 활동했고 연백군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동생 편덕렬을 상하이에 보내 임시정부와 연락했으며, 안악군을 비롯한 황해도 각 지역 대표들과 군자금 모집, 항일문서 배포, 독립군의 국내 진입 지원을 추진했다. 그러나 구월산주비단 사건에 관련되어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에는 박영효·노심선·김수장 등과 국내의 일제 시설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고,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접촉하기 위해 김경배·김태규·조종호 등과 만주로 건너갔다.

의성단의 무장투쟁과 한인 사회 지원

편강렬은 평화적인 교육과 계몽만으로 국권을 되찾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923년 만주 회덕현 오가자에서 양기탁·남정 등과 항일 무장단체 의성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출됐다. 약 250명의 회원을 둔 것으로 알려진 의성단은 훈련기관을 갖추고 일본 기관과 군수품 수송 열차를 공격했으며, 일본군과 직접 교전했다.

편강렬은 단원 5명과 장춘의 일본군을 습격했고, 봉천에서는 단원 7명과 일본 헌병을 상대로 장시간 시가전을 벌였다. 장춘에서는 단원 7명이 일본 영사관을 공격한 뒤 군경 200여 명과 약 7시간 교전하고 모두 귀환한 활동도 전해진다. 이 전투로 일본 군경 60여 명을 사상했다고 전해지지만, 일본 측 기록은 사망자를 17명으로 적고 나머지는 부상자로 기록했다. 의성단은 장춘의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과 길림의 일본 기관도 공격했다. 당시 신문은 “의열단의 침입에 전후하야 의성단의 침입 뎡보(정보)가 도달하엿슴으로 경무 당국은 대경실색하야 어젓줄 모르는 판인데…”라고 보도했다.

의성단의 역할은 무장투쟁에만 머물지 않았다. 만주의 이주 한인들은 농기구와 농지가 부족했고, 소작 과정에서도 지주와 마적의 피해를 겪었다. 의성단은 이들을 조직해 자치기관과 금융기관을 세우고 자금을 마련했으며, 교육기관을 운영해 문맹 퇴치에 나섰다. 의료품이 부족한 농민을 외부 공격에서 보호하는 일도 맡았다. 시대일보는 “단장 편강렬은 의성단의 확장을 위하야 중동선 연안과 합장선 디방에 단원을 파송하야 디방 인사들은 매우 환영한다”고 보도했다.

의성단원들도 국내외에서 교전을 이어갔다. 박일훈은 1923년 6월 의주 영산적경주재소에서 4곳에 총상을 입고도 주재소를 파괴했고, 또 다른 교전으로 총 9곳에 총상을 입고 순국했다. 김명제는 같은 해 장춘에서 무기를 받는 임무를 수행하다 발각되어 일본군 수비대와 싸우다 전사했으며, 편강렬은 1924년 2월 길림에서 추도회를 열었다. 김홍진과 김창진은 1924년 6월 9일 영덕 장사리 일경주재소에서 교전하다 순국했다. 일제 당국은 이들의 사격을 두고 “상당한 병식 훈련을 받은 것 같다”고 기록했다.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마지막 항거

편강렬은 만주의 여러 무장단체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면 독립운동 전선이 약해지고 동포들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로군정서·통의부·구국단·길림주민회 등과 연락했으며, 김규식·김좌진·지청천 등과 만주와 러시아 극동 지역 독립군의 통일 문제를 논의했다.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를 주도해 여러 단체 대표들과 통합을 협의했고, 하얼빈에서도 통일회 결성을 논의했다. 이러한 활동은 1925년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조직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편강렬은 1925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통합을 추진하던 중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국내로 압송된 그에게 일제는 “독립운동에서 손 떼면 도지사 벼슬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왜놈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1925년 10월 20일 공판의 최후 진술에서는 “나는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일제와 싸워서 일본에 한국인 총독을 두겠다.”고 말했다. 변호사들이 형을 줄이려고 변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편강렬은 척추염을 얻었고, 1929년 1월 16일 안동적십자병원에서 사망했다. 군자금 모집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지만 생을 마칠 때까지 무일푼이었으며, 조선인 조합원 400∼500명이 속한 안동현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이 참여한 장례식을 치렀다.

무장투쟁과 통합운동으로 남은 이름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편강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천 남산공원에는 순국기념비가 세워졌고, 강화도 평화전망대에는 이북 실향민들이 중심이 되어 마련한 추모비가 있다. 20여 년간의 독립운동은 의병활동,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 의열투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 등으로 이어졌으며, 편강렬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인물로 평가된다. 독립운동사는 그가 잦은 투옥과 고문으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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