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는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근무하며 간우회를 조직해 동료 간호부들과 만세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다. 1895년 12월 11일에 태어나 1943년 10월 16일 병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궁녀에서 간호부로
박자혜는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 박원순이며, 어머니에 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없다. 한성부에서 성장한 그는 어린 나이에 견습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갔다. 일제 강점으로 조선왕조가 무너지자 궁에서 나온 박자혜는 새로운 교육과 직업의 길을 찾았다.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입학해 1914년 졸업했으며, 1915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에 들어가 1916년 과정을 마쳤다. 경제적으로 자립하려 했던 그는 1917년부터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근무했다.
병원에서 시작된 간호사 독립운동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이어졌다. 이들을 치료하던 박자혜는 일제 기관에서 일하는 자신의 처지를 부끄럽게 여기고 직접 행동에 나섰다. 동료 간호부들을 모아 간우회(看友會)를 만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병원의 의사들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 참여를 주장했다.
박자혜는 이 활동으로 일경에 붙잡혔으나 병원장이 신병을 인도받아 풀려났다. 국내에서 더 활동하기 어려워진 그는 중국 베이징으로 떠나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궁궐의 견습 나인으로 출발해 근대교육을 받고 의료 현장에 들어선 그의 삶은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과 맞닿았다.
신채호와의 결혼과 궁핍한 국내 생활
박자혜는 1920년 베이징에서 자신보다 15세 많은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를 만나 결혼하고 대학을 중퇴했다. 1921년 첫째 아들 신수범을 낳았으며, 1922년 다시 임신한 상태에서 경제적 궁핍 때문에 아들과 함께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한 그는 서울 인사동에 ‘박자혜 산파’를 열어 생계를 꾸리려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산파에게 출산을 맡기는 여성이 많지 않아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박자혜는 풀과 참외를 파는 노점상 일까지 하면서 자녀를 길렀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신채호와 연락을 이어가며 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국내에서 이어간 독립운동 지원
박자혜는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고 해외에서 밀입국해 활동하는 이들을 도왔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된 뒤 군자금 모집을 위해 요원이 국내에 들어왔을 때에는 보천교 북방주 한규숙을 연결했다. 1926년 나석주가 토지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의거에서도 서울의 길을 안내하며 활동을 지원했다.
1927년 박자혜는 베이징에서 신채호와 다시 만났고 둘째 아들을 임신해 출산했다. 1928년 신채호가 일경에 체포된 뒤에는 책과 옷을 마련해 보내며 옥바라지를 맡았다. 그는 자녀의 양육과 생계를 책임지는 동시에 일경의 지속적인 감시와 폭력을 겪으며 독립운동의 후방을 지켰다.
신채호는 전향하면 가출옥시켜 주겠다는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여순감옥에서 숨졌다. 이후 첫째 아들 신수범은 한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신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박자혜는 홀로 셋방에서 지내다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10월 16일 병고로 생을 마쳤다.
간우회가 남긴 이름
박자혜는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라는 직업 현장에서 간우회를 조직해 동료들과 만세운동에 나선 독립운동가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뒤에도 국내 연락과 밀입국 활동가 지원, 군자금 모집 중개, 나석주 의거 지원을 이어갔으며, 궁핍한 생활 속에서 신채호의 활동과 옥중 생활을 뒷받침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박자혜는 독립운동의 후방을 지원하는 한편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와 폭력을 견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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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박자혜」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박자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