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신돌석, 평민 의병장으로 이끈 항일 의병투쟁…한국사 인물

[대한제국] 신돌석, 평민 의병장으로 이끈 항일 의병투쟁…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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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은 1878년 11월 26일(음력 11월 3일) 경상북도 영해 지역의 평민 농가에서 태어나 1896년 3월 13일 19세의 나이로 영해에서 100여 명을 이끌고 처음 거병한 평민 출신 의병장이다. 을사조약 뒤 다시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와 경상북도 여러 전장에서 싸웠고, 1908년 11월 18일 암살됐다.

영해의 평민 농가에서 자란 청년

신돌석은 1878년 11월 26일 음력 11월 3일 경상북도 영해 지역의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 해당하며, 아버지는 신석주이고 어머니는 분성김씨다. 본관은 평산이고 본명은 신태호이며, 자는 순경이다. 신돌석(申乭錫)이라는 이명 외에도 신태을·신태홍·신대호로 불렸다.

그가 성장한 영해에서는 1871년 이필제가 중심이 된 농민봉기가 일어나 부사가 목숨을 잃고 관아가 불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봉건체제에 맞서는 지역의 기질이 신돌석의 반봉건의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일제의 침략을 겪으면서 항일의식도 강해졌다고 설명한다.

19세에 시작한 영해 의병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신돌석도 행동에 나섰다. 그는 19세이던 1896년 3월 13일 영해에서 100여 명을 이끌고 처음 거병했다. 초기 의병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주로 유학자였던 상황에서 평민인 신돌석의 등장은 두드러졌다.

신돌석 부대는 경상북도 동해안 여러 지역을 장악한 뒤 안동의 유시연과 함께 김하락 부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연합부대는 영덕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했고, 중상을 입은 김하락이 투신해 사망하면서 신돌석의 의병대도 해산됐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신돌석은 동생 신우경과 다시 의병을 준비했다. 1906년 3월 13일 자신의 마을에서 100여 명을 모아 영릉의병장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4월에는 울진 장흥관에서 일본군 선박 9척을 기습해 파괴했고, 6월에는 원주의 병정들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활동 범위는 삼척·강릉·양양·간성 등 강원도 동해안과 경상북도 내륙으로 넓어졌으며, 일본군 주둔지를 공격하고 전선 설치를 방해했다.

태백산의 호랑이가 이끈 전투

이강년 부대와 순흥 공격을 위한 연합 작전을 시도하는 등 전과를 거듭하면서 그는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성장했다.

1907년에는 울진 매화당에서 수동으로 돌아와 병력을 새로 모은 뒤 영덕의 관공서를 공격했다. 원구에 진을 치고 청송에 집결한 일본군을 치기 위해 청부역으로 이동하자 지방민 3,000여 명이 가세했다. 신돌석 부대는 영양 주실로 물러나는 주둔병을 추격해 격전 끝에 물리쳤고, 그곳에서 10여 일 동안 주민들을 안정시킨 뒤 진보 삼위에서도 승리했다.

전투는 경주 대산성에서 청하와 영덕 조현으로 이어졌다. 신돌석 부대는 대산성에서 연일 싸웠고, 조현에서도 일본군을 꺾은 뒤 소항을 거쳐 대동으로 이동했다. 10월에는 영해경무서를 습격하고 수동에서 군량을 마련했다.

같은 해 12월 이인영을 중심으로 전국 의병부대가 서울 공격을 추진하자 신돌석은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1,000여 명을 이끌고 양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 진공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더욱이 13도연합의병의 지휘부와 부서가 양반·유생 출신 의병장 위주로 편성되면서 평민 출신인 신돌석과 홍범도·김수민 등의 부대는 제외됐다.

1908년의 항전과 최후

영해로 돌아온 신돌석은 1908년 1월 평해 독곡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2월에는 영양읍에 진을 쳤고, 3월 수비로 이동한 뒤 안동·울진·삼척·강릉의 의병과 연합해 전력을 강화했다. 이 병력은 춘양·황지·소봉동 등지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4월 울진 도곡에서는 일본군의 무기를 다수 빼앗았으며, 7월 평해 한곡과 9월 희암에서도 전투를 벌였다. 10월에는 안동 재산에서 영양 검정여점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추워지자 이듬해 봄의 활동을 기약하며 장병들을 돌려보낸 뒤 눌곡에 있는 부하 김상렬의 집에 몸을 숨겼다.

신돌석은 1908년 11월 18일 그곳에서 김상렬 형제의 계략에 빠져 암살됐다. 살해범과 방법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김상렬 삼형제가 범인이라는 설 외에 김도윤·김도룡 형제 또는 고종사촌 김자성이 범인이라는 설도 전한다.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에는 김자성이 신돌석을 자기 집으로 유인한 뒤 삼형제가 도끼로 살해하고 일본 헌병대에 알렸으나, 생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상금을 받지 못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신분의 벽을 넘어선 의병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신돌석을 한말 의병투쟁에서 평민 출신 의병대장 가운데 가장 먼저 거병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의 부대는 교묘한 게릴라 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이어갔으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지 않아 활동 지역 주민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았다.

다만 양반과 유생 출신 의병장들의 봉건적인 신분질서 관념은 평민 의병장인 신돌석을 백안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의병 지도자들 사이의 이러한 이념적 차이는 의병부대 간 통일전선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고, 평민 출신 의병장의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돌석의 부인은 한재여이고, 아들 신만이와 양자인 조카 신병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1995년에는 경북 영덕의 초가 생가가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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