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속에서 왕위 계승자로 자라다
정조(正祖)는 1752년 10월 28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산(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다. 형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이 되었고, 의소세자의 장례를 치른 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영조는 어린 원손의 총명함을 기뻐했다. 1755년 네 살이던 원손에게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읽어보도록 하자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 10자를 외고 ‘부모’ 두 글자를 썼다. 영조는 이후로도 원손이 한번 본 사람을 구별해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여러 차례 칭찬했고, 1757년에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했다. 김종수를 교리(校理)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했고, 원손은 1761년 4월 14일(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했다. 같은 해 관례에서는 대재학 김양택이 지은 반교문이 낭독됐는데, 나라의 맏손자로서 대통을 이을 사람임을 명심하고 요, 순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당부가 담겼다. 1762년 2월에는 김시묵의 딸을 세손빈으로 맞아 가례를 올렸는데, 뒷날의 효의왕후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15세이던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했지만, 영조는 그의 일 처리를 끊임없이 질책했다. 세자는 홍역을 앓는 와중에도 돗자리를 깔고 사죄하기도 했고,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남몰래 약을 지어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소론에 우호적이었고 노론과는 충돌을 거듭했으며, 관서행, 서연 불참, 기녀들과 풍류를 즐기는 등 문제 되는 행동도 많이 했다. 1762년 윤5월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고,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뒤에 죽었다. 정조가 11세 때였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인 윤5월 13일 무겸선전관 이석문이 어린 세손을 등에 업고 궐내로 들어왔고,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강제로 끌려나갔다.
엄격한 공부로 준비한 군주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혜경궁 홍씨는 영조에게 세손이 경희궁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요청했다. 혜경궁 홍씨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해야 했지만,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는 1776년까지 경희궁에서 살았다. 1764년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첫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 효장세자는 아홉 살에 요절했고 그의 빈 효순왕후도 정조가 태어나기 전인 1751년 별세했기 때문에, 이 양자 입적은 왕위계승권을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다.
스승 김종수는 군주가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스승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상적 시대인 하, 은, 주 삼대 시절처럼 다시금 군주가 학문 정치를 이끌 수 있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는 것으로, 곧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것이었다. 김종수는 어린 세손에게 만개의 하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처럼 될 것을 강조했고, 군주는 만인을 감싸안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론이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할 때에는 소수의 노론 내 인사들과 이를 극력 반대했고, 이천보, 유척기 등과 함께 소론과도 손을 잡고 세손을 지지했다. 김종수의 건의는 후일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즉위한 뒤에도 통치자이면서 아버지이자 스승이 되려 했고, 스스로도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었다.
세손 시절 정조는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공부에 열중했다. 조선시대 왕이 정기적으로 유학 강연을 듣고 토론하는 학습을 경연, 세자의 학습을 서연이라고 했는데, 세손도 서연을 열었다. 서연에서는 《효경》, 《소학초략》, 《동몽선습》 같은 아동용 입문서에서 시작해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경서를 강론했고, 열 살 이후로는 《사략》, 《강목》 같은 역사서를, 열일곱 살에는 《성학집요》, 《주자봉사》 같은 것을 별도로 강론해 하루에 세 번 서연을 여는 강행군이었다. 서연은 존현각에서 행해졌고, 주변의 주합루, 관문루, 동이루 같은 누각들에 책을 비치해 도서관으로 삼았다. 1774년 정조는 《경희궁지》를 지어 자신이 기거하는 곳과 공부하는 곳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정조는 사서오경에서 춘추, 진서, 한서 등 중국의 사서부터 국내의 사서와 한글소설, 의사들이 쓴 의서까지 다양한 책을 읽었다. 경학 못지않게 무예의 단련에도 관심을 보여 활쏘기를 즐겼는데, 즉위 이후 정조의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어사고충첩》에는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1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해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의학적 임상가들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정조가 질병에 대해 자기의 의견을 나타내고 처방을 하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에서 정조를 의학적 식견을 가진 왕으로 평가한다.
대리청정을 넘어 조선 제22대 왕으로
노론 벽파 계열이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하자 세손은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했다. 홍국영은 세손에게 불리한 자료로 작용할 만한 자료와 물건들을 찾아 제거했다. 김종수는 외척이 주를 이룬 벽파와는 다른 정파인 청명당을 구성했는데, 1772년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김종수 등을 유배 보냈다. 김종수는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됐다가 다음 해 방면됐다.
1775년 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 벽파는 이를 극구 반대했다. 당시 나이는 24세였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시키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대리청정을 맡겼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홍계회,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벽파는 정조의 즉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 한 바 있다.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해 세손은 위기를 모면했고, 영조는 순감군(巡監軍)의 수점권도 넘겨 만약을 대비했다. 정조는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했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4월 27일(음력 3월 10일) 즉위했다. 즉위식을 연 바로 그날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했다. 이는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곧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여덟 자 흉언(凶言)을 유포시키던 일부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정조는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 생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숭했다. 그러나 생부를 장헌으로 추숭하는 것은 “오직 종천(終天)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며 더 이상 생부의 추도사업을 할 뜻이 없음을 함께 내비쳤다. 당시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첨예하게 대립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정후겸과 홍인한을 유배 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으로 이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인재 등용과 왕권 강화의 개혁 정치
정조는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했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했다. 홍국영을 기용해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 즉위 후에는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해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청명당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했다. 생부의 죽음을 둘러싼 노론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심환지 등을 총애해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 기간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해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하고,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을 재간행했으며,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했다. 정조는 아이들에 대한 정책들도 제시했다. “모든 부모들은 아이들을 임금님을 대하듯이 우러보아야 하며 이는 아이들이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다. 정조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엎드려 절까지 했다고 한다.
또 육의전을 제외한 시정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했다. 윤지충 사건(신해박해) 이후 노론 벽파의 공세가 강화되자, 노론 내 소수파였던 북학파 박지원 등의 문장을 이용해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켜 반성문을 쓰게 했다.
수원 화성 축성과 말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새롭게 성을 축조했다. 1789년 10월 묘를 이장해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하고, 인근에 화성(華城)을 축조했다. 1792년 초여름에는 정약용에게 성을 축조하는 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라고 지시해 거중기를 고안하게 했고, 참고할 자료로 《도서집성》과 《기기도설》을 전달했다.
화성은 1794년 착공해 1796년 완공됐다. 성의 둘레는 5,744 m, 면적은 130 ha로, 문루 4개, 수문 2개, 공심돈 3개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하나의 성곽을 이루었다. 공사 책임자는 채제공이었고, 공사 도중 가뭄으로 한때 공사를 중지하기도 했으나 2년 7개월 만에 완공했다. 정조는 강제부역에 동의하지 않아 축조에 동원된 인부에게 급여를 지급했고, 공사에 사용된 자재, 인건비 등을 모두 기록해 남겼다. 공사 경비로는 돈 873,520냥과 곡식 13,300석이 들었다. 정조는 거중기를 사용해 돈 4만 냥을 아낄 수 있었다며 정약용을 칭찬했다.
정조는 화성 축조의 모든 기록을 정리해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화성이 크게 훼손된 뒤 1975년 화성복원공사를 할 때 《화성성역의궤》는 화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정조는 화성에 유수부(留守府)를 두고 행궁과 군영을 설치해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했다. 화성에 주둔한 장용영은 기존의 중앙군영이 노론 세력에게 장악당한 것과 달리 국왕이 직접 관리할 수 있었다.
정조는 화성 안에 노래당(老來堂)과 미로한정(未老閑亭)을 지었다. 세자가 15세가 되는 1804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어머니와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세상을 떠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승하 직전에는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 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였다.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었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며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가 되었다. 정조는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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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정조 (조선)」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