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경쟁의 병목, 반도체에서 전력으로 이동
5일 국내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의 급격한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액화천연가스 발전과 에너지저장장치, 소형모듈원자로를 하나의 체계로 묶는 ‘에너지 올인원’ 설루션 산업이 부상하고 있다. 연합뉴스는 수만 개의 그래픽처리장치와 서버가 동시에 가동되는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서 전력 인프라가 실제 가동 시점을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인공지능 산업의 주도권 경쟁이 고성능 반도체와 서버 확보를 넘어, 막대한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정교하게 관리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확장된 것이다.
데이터센터 사업자에게 전력은 단순한 운영비 항목이 아니다. 서버를 확보하고 건물을 완성하더라도 필요한 전력이 적시에 공급되지 않으면 시설을 가동하거나 연산 능력을 확대하기 어렵다. 특히 인공지능 데이터센터는 다수의 그래픽처리장치가 한꺼번에 연산을 수행해 전력 부하가 빠르게 변한다. 따라서 발전량뿐 아니라 전력의 안정성, 공급 확대의 유연성, 저장 능력, 탄소 감축 목표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 데이터센터 사업의 경쟁력이 정보기술 설비와 에너지 시스템의 결합에서 결정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 변화는 한국 기업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 준다. 한국은 인공지능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배터리, 발전 사업을 각각 분리된 산업으로 바라보기보다 서로 연결된 기반 기술로 재구성할 기회를 맞고 있다. 고객의 가동 일정과 전력 사용 특성을 먼저 분석하고 연료 조달부터 발전, 저장, 공급까지 통합하는 역량이 중요해지면서, 에너지 기업도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기술 공급자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됐다.
LNG와 ESS가 만드는 초기 전력 조합
현재 대규모 전력 수요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원으로는 액화천연가스 발전이 꼽힌다. 액화천연가스를 이용해 가스 터빈과 스팀 터빈을 돌리는 복합발전은 데이터센터가 처음 가동될 때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고, 서버 증설에 따라 발전 규모를 단계적으로 늘리는 데 유리하다. 날씨와 시간대에 영향을 받는 재생에너지보다 출력 조절이 쉽고, 연료가 공급되면 필요한 시점에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도 데이터센터 운영과 맞닿아 있다.
배터리 기반 에너지저장장치는 발전소를 대체하기보다 전력의 품질과 안정성을 높이는 역할을 맡는다. 수만 개의 그래픽처리장치와 서버가 동시에 작동하면 전력 부하가 짧은 시간에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에너지저장장치는 이 같은 변동을 완화하고 발전량과 실제 수요 사이의 차이를 조절해 전력 공백의 위험을 낮춘다. 액화천연가스 발전이 필요한 전력량을 공급하는 축이라면, 에너지저장장치는 공급과 소비의 균형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축인 셈이다.
다만 두 기술만으로 대규모 데이터센터에 하루 24시간 전력을 공급하는 데에는 탄소 배출과 연료비 부담이 따른다. 업계는 단기적으로 액화천연가스 발전과 에너지저장장치가 데이터센터의 신속한 가동과 안정성을 뒷받침하고, 중장기적으로는 무탄소 전력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소형모듈원자로가 이를 보완하는 구조를 전망한다. 하나의 발전원에 의존하기보다 서로 다른 기술의 장점을 조합하는 능력이 에너지 설루션 기업의 경쟁력을 가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된다.
글로벌 빅테크가 원전 개발 파트너로 나선 이유
글로벌 기술 기업들도 전력을 외부에서 구매하는 고객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차세대 발전 프로젝트의 투자자와 개발 파트너로 역할을 넓히고 있다. 메타는 검증된 대형 원전에서 생산한 전력을 장기 계약으로 확보하면서 테라파워, 오클로 등 소형모듈원자로 기업과 중장기 프로젝트를 검토하는 전략을 택했다. 기존 원전의 안정성과 차세대 원전의 확장 가능성을 함께 확보하려는 접근으로 해석된다.
아마존은 미국 소형모듈원자로 기업 엑스에너지에 전략적으로 투자했다. 또 워싱턴주에서 고온가스로 기반 소형모듈원자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공공 전력 공급 기업 에너지 노스웨스트와 협력하고 있다. 이는 인공지능 기업의 투자 범위가 데이터센터 건물과 반도체를 넘어 발전 기술과 전력 공급망까지 넓어졌음을 보여 준다. 연산 설비의 규모가 커질수록 에너지 확보가 성장 속도를 결정하기 때문에, 빅테크가 필요한 전력을 장기간 예측하고 발전 단계부터 관여하는 흐름이 강화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 같은 움직임은 인공지능 산업의 가치사슬을 다시 정의한다. 기존에는 반도체의 성능과 서버의 처리 능력이 기술 경쟁을 설명하는 대표 지표였다면, 이제는 발전원을 확보하고 전력을 저장하며 부하 변화에 대응하는 운영 능력도 같은 체계 안에서 다뤄진다. 인공지능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거나 확장하려는 지역과 기업에는 전력 생산량만큼 공급의 지속성, 탄소 감축 수단, 설비 확대 속도를 함께 제시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한국형 ‘에너지 올인원’이 겨냥하는 시장
한국에서도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생산공장처럼 전력 사용량이 큰 시설이 늘면서 제조 대기업의 전력 조달 역량이 생산능력 확대와 신사업 추진의 전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액화천연가스 도입과 발전, 에너지저장장치, 소형모듈원자로 기술을 함께 다룰 수 있는 사업자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전력을 생산해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객의 시설 가동 시점, 수요 변화, 부하 특성, 탄소 감축 목표를 분석해 맞춤형 조합을 제공하는 사업 모델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이러한 통합 사업에 필요한 기반을 갖춘 국내 기업으로 거론된다. 미국과 호주의 가스전을 활용한 액화천연가스 직접 도입 역량과 발전·전력사업 기반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자회사 SK아이이테크놀로지를 흡수합병해 배터리와 분리막 사업을 재편했다. 이를 통해 배터리와 에너지저장장치 가치사슬을 기존 에너지 사업과 연결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로 다른 사업 자산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결합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달 미국 소형모듈원자로 개발사 테라파워와 한국형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 사업 모델인 ‘K-나트륨’ 협력 합의서를 체결한 바 있다. 액화천연가스와 배터리 기반 저장 기술에 차세대 원전 역량까지 더해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의 대규모 전력 수요에 대응하려는 구상이다. 다만 각 기술은 공급 시점과 역할이 다르므로 단기 전력 확보 수단과 중장기 무탄소 전원 전략을 구분해 실행하는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분석된다.
한국 기업에 이번 흐름은 인공지능 시대의 수출 품목이 반도체나 서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발전원과 저장장치, 연료 조달, 전력 운영을 통합한 설루션이 경쟁력을 확보한다면 한국의 배터리·에너지 기술은 글로벌 데이터센터 생태계의 핵심 기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 세계 독자에게도 이 사건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 기술 기업의 다음 경쟁 무대가 인공지능 모델 자체를 넘어, 그 모델을 쉬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 전력 시스템으로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