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성리학과 외교로 고려를 지키다

정몽주, 성리학과 외교로 고려를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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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끝자락에서 태어난 포은 정몽주

정몽주(鄭夢周)는 고려(918~1392)가 마지막 세기를 지나던 1338년 1월 13일, 곧 1337년 음력 12월 22일 경상북도 영일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며, 훗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버지는 정운관으로, 정거민이라는 이름으로도 전하며, 어머니는 영천 이씨였다. 출생 후 가족은 청림동으로 이주했고, 소년기에는 외가가 있던 영천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정몽주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외교관, 유학자로 성장했으며, 후대에는 고려삼은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가문은 오랫동안 관료를 배출한 양반 가문이었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자 진현관제학 정종흥의 5대손이었다. 고조부 정림은 판도판서에 이르렀고, 증조부 정인수는 검교군기감을 지냈으며 뒤에 개성부윤으로 추증되었다. 조부도 직장과 동정 등의 직함을 지녔다. 다만 선조 3대가 검교직과 동정직을 가졌을 뿐 현직에 나아가지 못한 지방 사족이었다는 점에서, 정몽주의 집안은 고려 말 중소 지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의 사회적 성격을 보여준다. 아버지 정운관 역시 향시에 합격해 성균복응제생이 되었으나 높은 현직을 지낸 인물은 아니었다.

처음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어머니가 품에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었다는 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후 몽룡(夢龍)으로 고쳤다가, 아버지가 꿈에서 중국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정치가인 주공을 만났다는 태몽에 따라 다시 몽주(夢周)로 바꾸었다. 정몽주는 어려서부터 기억력과 암기력이 뛰어났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까마귀가 싸우는 곳에 흰 백로가 가지 말고 맑은 물에 씻은 몸을 더럽히지 말라는 뜻의 ‘백로가’를 지어 가르쳤다. 이 작품은 훗날 충절의 상징으로 기억된 그의 생애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

성리학을 배우고 과거의 정상에 서다

정몽주는 처음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고, 이후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다만 이색의 문인이라는 전승과 달리 이를 명확히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다는 지적도 SOURCE에 함께 전한다. 이색은 안향과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이제현의 제자였고, 고려에 전해진 성리학의 중요한 학통을 이어받은 학자였다. 정몽주와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이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고 설명된다. 정몽주는 이 학문을 이숭인과 길재 등에게 전했고, 길재는 조선 사림파의 비조가 되었으며 또 다른 제자 권우는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는 조준·남은·정도전 등을 만났다. 특히 정도전과는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에 따라 개혁하고, 권문세족의 지배에서 농민을 해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두 사람은 청소년기부터 오랜 친구이자 사상적·정치적 동지로 협력했다. 그러나 고려를 개혁해 유지할 것인지,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으로 새 질서를 세울 것인지를 놓고 결국 갈라섰다. 정몽주는 온건개혁을 선택했고, 정도전은 역성혁명 세력의 핵심이 되면서 두 사람은 마침내 정적으로 돌변했다.

1355년 공민왕 4년, 아버지 정운관이 세상을 떠나자 정몽주는 영천 도일동에 장사를 지내고 묘소 곁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당시에도 두드러진 효행으로 여겨진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공민왕은 그의 집을 특별히 포상하고 정표를 세웠다. 1357년 여름에는 어사대부 신군평이 주관한 감시에 합격했고, 1360년 10월 문과의 세 차례 시험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다. 당시 지공거는 난계 김득배, 동지공거는 한방신이었다. 정몽주는 예문관검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수찬과 직한림원 등을 지냈으며, 학문으로 닦은 능력을 국가 행정과 군사 현장에서 펼치기 시작했다.

변방과 조정에서 드러난 의리와 학문

과거 급제 뒤 정몽주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했다. 1363년에는 낭장 겸 합문지후와 위위시승을 지냈고, 선덕랑에 올라 다시 한방신을 따라 화주로 출정했다.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으며, 1364년에도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공격하는 군사 활동에 종군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 노선에 동조했지만, 훗날 왕조 교체라는 혁명의 방법을 둘러싸고 이성계 세력과 충돌하게 된다.

그의 의리는 과거 시험을 주관했던 김득배의 죽음에서 선명하게 나타났다. 김득배는 홍건적을 격파하고 개경을 수복했지만 김용의 모해로 투옥된 뒤 상주에서 처형되어 효수되었다. 역적으로 몰린 김득배를 위해 문생들이 거의 나서지 못할 때 정몽주는 홀로 왕에게 간청해 시신을 거두고 장례를 치렀다. 그는 제문에서 홍건적 침입으로 임금이 서울을 떠나고 국가의 운명이 실 한 가닥처럼 위태로웠을 때 김득배가 대의를 먼저 외쳐 삼한의 대업을 회복했다고 강조했다. 개선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칼날의 피가 된 현실을 하늘에 묻는 그의 글은 공과 죄를 정당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강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정몽주는 전보도감판관과 전농시승을 거쳤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사직해 상례를 지켰다. 당시 사대부들조차 100일이 지나면 상복을 벗는 등 상제가 문란했지만, 그는 부모의 분묘를 지키며 애도와 예절을 극진히 해 다시 왕의 표창을 받았다. 복직 후 예조정랑 겸 성균관박사와 성균관사예를 지냈으며, 1367년 통직랑 전공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371년에는 태상소경과 보문각응교 겸 성균관직강을 거쳐 성균관사성에 올랐다. 관료로서의 출세와 별개로, 예법을 몸소 실천하고 경전을 가르친 일이 그의 명성을 굳혔다.

‘동방 이학의 시조’와 고려의 대명 외교

성균관박사 시절 정몽주는 유교 경전을 강의했다.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전 주석서는 사서에 관한 주자의 주석서인 《주자집주》 정도였지만 그의 강의에는 막힘이 없었다. 뒤에 송나라 학자 호병문의 《사서통》이 전해졌을 때 정몽주의 설명과 서로 맞아떨어지자 사람들이 탄복했다. 대사성 이색은 그를 높이 평가해 ‘동방 이학의 시조’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다른 유교 경전들이 들어온 뒤에도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비교해 틀린 곳이 없었다고 전해지면서, 그는 동방 성리학의 실질적인 창시자 또는 중시조로 평가받게 되었다.

정몽주는 성리학을 강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한 국제 질서를 고려의 외교정책에 반영하려 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명을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했다. 신돈이 신진사류를 발탁하면서 정몽주도 요직에 올랐으나, 1371년 신돈이 역모죄로 처형된 뒤에는 그 일파라는 의심을 받아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그럼에도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류는 새 강국으로 떠오른 명나라와의 관계 수립에 필요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신돈의 죽음을 애석히 여겼으면서도 훗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모략에 가담하고 협력한 것으로 기록된다.

1372년 3월에는 명나라가 서촉 지방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정사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 남경에서 고려로 돌아오던 배가 태풍으로 난파해 홍사범 등은 익사했고, 정몽주는 바위섬에서 13일 동안 표류한 끝에 살아남았다. 그는 굶주림 속에서도 명 태조 주원장의 서신을 가슴에 품어 물에 젖지 않도록 보존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명 태조가 배를 보내 귀국을 도왔고, 정몽주는 명나라의 깊은 신뢰를 얻어 1373년 7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후대에는 그가 중국 객관에서 지은 “봉천문 앞에서 천자를 배알하고, 금릉 땅 저자에서 가인과 취했노라”라는 시구도 전해진다.

온건개혁의 선택과 선죽교의 죽음

1374년 경상도안렴사로 부임한 정몽주는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내직으로 돌아와 예문관직제학이 되었다. 공민왕의 죽음과 김의의 명나라 사신 살해로 명이 고려 조정에 책임을 추궁하자, 조정에서는 명에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정몽주는 사신을 보내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했다. 1375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유학을 크게 진흥했고, 1376년 우사의대부를 거쳐 다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그는 이인임 등이 내세운 배명친원 정책과 명·북원을 동시에 상대하려는 이중 외교를 반대했으며, 박상용·김구용 등 10여 명과 함께 상소했다. 쇠퇴하는 원보다 강해지는 명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정몽주는 이후 예의판서·예문관제학·수원군 등을 거치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했고, 명나라에 외교관으로도 다녀왔다. 관직은 수문하시중과 익양군충의백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를 유지하면서 개혁하려는 그의 온건개혁론은 새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정도전 계열의 역성혁명론과 양립할 수 없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392년 공양왕 4년 음력 4월 4일,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암살되었다. 시조 ‘단심가’로 유명한 그의 이름은 이 죽음과 결합해 고려에 대한 변치 않는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암살 직후 정몽주는 역적으로 단죄되었지만 평가는 곧 뒤집혔다. 1401년 태종은 그를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로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다. 태종이 정도전과 남은을 제거한 뒤 그들을 격하하기 위해,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피살된 정몽주를 의도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높였다는 해석이 전한다. 그의 학통을 계승한 사림파가 집권한 뒤에도 현창과 성인화가 계속되었고, 그는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반면 1990년대부터는 이러한 성인화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나타났다. 오늘날 정몽주가 기억되는 이유는 단순히 한 왕조의 마지막 충신이어서만이 아니다. 그는 변방의 군사 활동, 성리학 연구와 교육, 명나라와의 외교, 고려 개혁을 둘러싼 정치적 선택을 함께 감당했으며, 끝내 자신이 선택한 질서와 원칙을 죽음 앞에서도 바꾸지 않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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