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성리학과 외교로 고려를 지키다

정몽주, 성리학과 외교로 고려를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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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문신이자 외교관, 포은 정몽주

정몽주(鄭夢周)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외교관, 유학자다. 1338년 1월 13일(1337년 음력 12월 22일)에 태어나 1392년 음력 4월 4일 개경 선죽교에서 피살됐다. 본관은 영일(지금의 경상북도 포항),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삼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추밀원지주사 정습명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 다른 이름 정거민), 어머니는 영천 이씨다. 선조 3대는 검교직과 동정직을 가졌을 뿐 현직에 나아가지 못한 지방 사족이었다. 어머니가 품에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해서 처음 이름을 몽란이라 했고, 뒤에 몽룡으로 고쳤다가 아버지가 꿈에서 주나라 문왕의 아들 주공을 만났다는 태몽에 따라 다시 몽주로 바꾸었다.

어머니 영천 이씨는 아들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시 ‘백로가’를 지어 가르쳤다고 전한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 청강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장원 급제와 김득배의 장례

정몽주는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다. 1355년(공민왕 4)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영천 도일동에 장사를 지내고 묘소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때 지공거는 김득배, 동지공거는 한방신이었다. 이후 예문관 검열·수찬 등을 지냈다.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해 개경을 수복하고도 김용의 모해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정몽주는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해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그는 제문에 “지난날 홍건적이 침입하여 임금이 서울을 떠나시니 국가의 운명이 한가닥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위태롭거늘, 오직 공이 먼저 대의(大義)를 선창하자 원근이 향응하였고 몸소 만번 죽을 계책을 내어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하였으니 …”라고 쓰고 “그런데 이제 말의 땀이 마르지 않고 개선하는 노래가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태산 같은 공을 오히려 칼날의 피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하늘에 묻는 바입니다.”라고 물었다.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종군해 이성계와 함께 여진 토벌에 참가했고, 1364년에도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을 치는 데 종군했다. 이어 전보도감판관·전농시승을 지냈다. 당시 상제가 문란해 사대부들이 백일이 지나면 상복을 벗었는데, 정몽주는 부모의 상에 여묘를 살며 예절을 극진히 해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받았다.

‘동방 이학의 시조’와 대명 외교

정몽주는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를 거쳐 성균관 사예·직강·사성을 지냈다. 성균관에서 경전을 강의할 때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으나 그의 강설에는 막힘이 없었고,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의 《사서통》이 전해지자 그 내용과 서로 맞아떨어져 모두 탄복했다. 대사성 이색은 그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길재는 사림파의 비조가 되었고 권우는 세종의 스승이 되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명과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했다. 1372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풍랑으로 배가 난파해 일행 12명이 익사했으나,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구조돼 이듬해 귀국했다. 이때 중국의 한 객관에서 지은 시 “봉천문 앞에서 천자를 배알하고 / 금릉 땅 저자에서 가인과 취했노라”가 전한다.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서 이인임 등이 주장한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에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됐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때 그는 박상용·김구용 등 10여 명과 함께 상소했다. “점점 강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가는 원나라와 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구의 침구가 심하던 때에는 일본 규슈의 패가대에 건너가 왜구 단속을 요청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했다. 1384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악화된 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고, 1386년에는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관철했다.

온건개혁과 선죽교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웠다. 불교식이던 상제 대신 《가례》에 따라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했고, 서울에 오부학당을, 지방에 향교를 두어 교육을 진흥했으며, 의창을 다시 세우고 수참을 설치했다. 1392년에는 《대명률》·《지정조격》과 고려의 법령을 참작해 신율을 만들었다. 관직은 수문하시중과 익양군충의백에 이르렀다.

정도전과는 청소년기부터 오랜 친구이자 사상적·정치적 동지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등하다 정적이 되었다. 정몽주는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조준·남은·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했다. 이를 눈치 챈 이방원이 역으로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정몽주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가던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에게 살해됐다.

그가 지은 시조 ‘단심가’는 정몽주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널리 회자된다. 이방원이 ‘하여가’로 마음을 떠보자 이에 답해 지은 노래로,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 뜻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내용이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한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됐으나 1401년(태종 1) 권근의 요청으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됐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됐고, 개성의 숭양서원 등 13개 서원에 제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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