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으로 세상을 다시 보려 한 청년
정도전(鄭道傳)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활동한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혁명가였다. 출생 연도는 1342년 또는 1337년으로 전하며, 1398년 음력 8월 26일에 생을 마쳤다. 본관은 봉화,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이고 훗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고려의 부패한 권문세족 정치와 그에 기생한다고 본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단순히 한 왕조의 관리로 머문 것이 아니라,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정치적 전환의 이념과 제도를 준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과 영주 우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주이며 양주 삼각산에서 성장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정운경은 청백리로 알려졌고, 사후 공식 시호를 받지 못하자 선비들이 염의(廉義)라는 사시를 지어 올려 염의선생이라 불렀다. 정도전에게는 정도존과 정도복이라는 두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중앙 관직으로 옮기면서 가족은 개경으로 이주했고, 정도전은 고려의 정치와 학문이 집중된 공간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했던 정도전은 집안의 학문과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을 통해 기초를 익힌 뒤, 개경에서 이제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곡과 나이를 뛰어넘은 두터운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과도 가까워질 수 있었다.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해 성균관에 들어간 그는 대사성이자 성균박사였던 이색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 이색은 안향·백이정·이제현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한 학자였고, 정도전은 그 문하에서 정몽주와 권근을 비롯한 고려 말 성리학자들과 학문적 기반을 공유했다.
학문이 현실 개혁론으로 바뀌다
성균관 시절 정도전은 경사(經史)를 강론했고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했다. 함께 공부한 인물로는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설장수, 박상충, 이숭인, 하륜, 권근 등이 있었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했지만, 부패한 현실을 바라보며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었다. 학문은 인간과 사회가 마땅히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만, 당시 고려에서는 권문세족의 전횡과 백성의 피폐한 생활이 그 이상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불교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정도전은 사원경제가 팽창하고 타락하면서 국가 경제와 민생을 해치고 있다고 보았다. 백성이 불교에 귀의하면서 국가의 조세 수입이 줄고 부역에 동원할 인력도 부족해져 국가 운영 자체가 위기에 놓였다고 판단했다. 개인의 현실적인 삶조차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후 세계를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공자의 의견에도 강하게 동조했다. 이러한 비판은 만년에 저술한 《불씨잡변》으로 집성되었고, 조선 사회에 유교 성리학을 정착시키고 국교화하는 데 기여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가장 뜻이 잘 맞았던 동문이었다.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유교 경전과 성리학, 시를 배우며 영향을 받았고, 반대로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을 해방하고 부패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정몽주에게 전했다. 정몽주도 이에 감격해 공조했다. 두 사람은 청소년기부터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에 맞게 개혁해야 한다는 뜻을 품고 오랫동안 사상적·정치적 동지로 협력했다. 그러나 고려를 개혁할 것인지, 새 왕조를 세울 것인지를 둘러싸고 입장이 갈리면서 훗날 조선 개국 과정에서는 첨예한 정적이 되었다.
유배와 가난 속에서 확인한 백성의 현실
정도전은 1360년 성균시에 합격한 데 이어 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했고, 1363년 충주사록을 시작으로 전교시주부와 통례문지후를 지냈다. 그러나 1365년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관직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내려갔다. 이듬해인 1366년 1월과 12월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영주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다. 당시 관료와 지식인 사이에서는 백일 탈상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실제로 봉행했다. 1369년 가을 상을 마치고 삼각산으로 돌아온 뒤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했다.
1370년에는 박상충·박의중·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그는 정몽주를 비롯한 교관들과 명륜당에서 날마다 성리학을 수업하고 강론했으며,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가 되어 인재 선발을 관장했다. 1371년 태상박사와 예의정랑을 지냈고, 신돈이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었다. 하지만 1374년 공민왕이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살해되면서 친명파였던 정도전은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치는 한편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75년 성균관사예와 지제교가 된 정도전은 북원 사신을 맞이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이인임과 지윤 등이 사신을 받아들이려 하자 그는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고 말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원나라와 이중으로 통교하고 명나라 공격을 위한 합동작전에 응하자는 주장에도 반대했다. 결국 권신들의 노여움을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 거평부곡으로 유배되었다. 귀양길에는 곤장을 맞을 뻔했으나 석기의 난이 일어나 경황이 없었던 탓에 장형은 피했다. 유배지에서도 성리학 서적을 연구하고 마을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1377년 풀려난 뒤에는 영주·안동·제천·원주 등을 4년 동안 유랑했다. 1381년 가을 거주 제한이 완화되자 삼각산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를 지어 삼봉재라고 이름 붙인 뒤 후학을 가르쳤다. 전국에서 많은 학생이 찾아왔지만 지역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다. 부평부사 정의에게 의탁해 부평부 남촌에서 교육을 다시 시작했으나, 그곳에서도 한 재상이 별장을 짓는다는 이유로 학숙을 폐쇄했다. 결국 김포로 옮겨야 했던 그는 향민과 벗에게 걸식하거나 직접 밭을 갈았다. 이 과정에서 기근과 가난으로 죽어가는 백성, 이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 국가 재정을 위협하는 사원경제를 직접 마주하며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이성계를 만나 새 왕조의 길을 열다
1383년 가을 정도전은 함길도 함흥으로 가서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만났다. 정몽주에게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한 이성계의 명성을 들었던 그는, 피폐한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바로잡으려면 혁명 외에는 대안이 없으며 이를 실행할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성계의 정예 군대는 군령을 엄격히 지켰고 무기가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훈련에도 열심이었다. 정도전은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물었고, 이성계가 뜻을 되묻자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일이라고 답했다.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논했다. 다음 날 정도전은 군영 앞의 오래된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이성계를 위해 시를 지었다. 그는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면서 때가 오면 천명에 따라 세상을 구하고 자신과 함께 큰 역사적 과업을 이룰 것이라는 뜻을 드러냈다. 이성계는 개혁 세력에 대한 협력과 지원을 약속했다. 정도전은 그의 막료이자 측근이 되었고, 두 사람은 마침내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까지 논의하게 되었다.
1384년 정도전은 전교시부령으로 복직해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그는 양국 사이의 첨예한 외교 갈등을 해소하고 우왕의 승습과 공민왕의 시호를 받아 귀국했다. 이후 성균관 좨주와 지제교를 거쳤고, 1386년에는 외직을 요청해 남양부사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뒤에는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학자와 교육자, 지방관, 외교 실무자를 거친 경험은 새 국가의 운영 원리를 구상하는 바탕이 되었다.
토지 개혁에서 조선의 국가 설계까지
1388년 음력 6월 제1차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정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밀직부사로 승진했다. 그는 조준·남은·윤소종 등과 함께 이성계의 핵심 세력이 되어 전제 개혁에 착수하고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고쳤다. 권문세족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해 새 정권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백성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에 따라 분배하는 방안도 건의했다. 토지를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에게 주어야 한다는 그의 오랜 주장을 정치 제도로 실현하려 한 것이다.
개혁 과정에서 정도전은 스승 이색, 친구 정몽주와 점차 멀어졌다. 그는 최영·이인임·염흥방·조민수 등 기존 세력을 제거하며 새 왕조 건설의 기반을 닦았다. 1388년 우왕을 몰아내고 이색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세웠으며, 우왕의 측근인 최영 일파도 제거했다. 1389년 음력 11월에는 여주에 유배된 우왕이 김저와 정득후에게 보검을 주고 곽충보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드러났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하고 강화도로 유배했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추대했지만, 결국 고려를 유지하려는 정몽주와 결별했다.
1392년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참여해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고 봉화백에 봉해졌다. 판삼사사를 지냈으며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로 추증되었다. 그는 성리학을 새 왕조의 이념적 바탕으로 삼고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의 체제를 정비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일부 마련했다.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 이름도 직접 지었다고 전한다. 그의 역할은 왕을 보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도 공간의 명칭과 국가 운영의 원리까지 새 왕조의 질서에 맞추어 구성하는 것이었다.
미완의 개혁과 오늘날의 정도전
정도전의 말년은 그가 설계한 국가 안에서 벌어진 권력 충돌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1388년 음력 6월의 제1차 요동 정벌과 1392년 제2차 요동 정벌에는 반대했지만, 조선 건국 뒤에는 요동 정벌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했다. 또한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거느린 사병을 혁파하려 했다.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를 지향한 그에게 사병은 국가의 군사력이 왕자와 공신에게 나뉘어 있는 문제였지만, 이를 보유한 세력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1398년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고, 정도전은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사망일은 1398년 10월 6일, 곧 음력 8월 26일로 전한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역적으로 규정한 반면 정몽주는 추상했다. 그 결과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핵심적으로 참여한 개국공신이었음에도 오랫동안 조정에서 배격되었고,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었다. 그의 정치적 명예가 회복된 것은 고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오늘날 정도전이 기억되는 이유는 왕조의 교체를 주장한 혁명가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유배와 유랑 속에서 백성의 가난과 권문세족의 수탈을 목격했고, 토지·조세·군사·관료 제도를 하나의 국가 구상으로 연결하려 했다. 성리학을 현실 정치의 원리로 삼고, 불교와 사원경제를 비판했으며, 한양의 전각과 거리 이름에까지 새 왕조의 질서를 담고자 했다. 그의 구상은 권력 투쟁 속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지만, 조선의 이념과 체제를 마련하고 장기간 지속될 왕조의 기틀을 다진 설계자로 평가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