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4대 군주 광종은 949년 음력 3월 13일 동복형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한 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관복 제도를 통해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왕위에서 멀었던 태조의 넷째 아들
광종은 925년 태조와 신명순성황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소이고 자는 일화다. 태조의 넷째 아들이었던 그는 여러 형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왕위 계승권에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혜종이 병약하고 동복형 태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형 요와 함께 유력한 계승자로 떠올랐다. 태자 시절에는 혜종과 서경 세력 사이의 교량 역할을 했으며, 호족들이 자신과 연고가 있는 왕자를 왕위에 올리려고 경쟁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945년에는 동복형 정종이 왕위에 올랐다. 병세가 깊어진 정종은 자신의 아들 경춘원군 대신 동생 소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했고, 광종은 949년 음력 3월 13일 즉위했다. 즉위 직후에는 백성과 호족의 불만을 샀던 정종의 서경 천도 계획을 취소했다. 949년 8월에는 공신들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지급하고 이를 녹봉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각 지역이 바칠 세금의 액수도 정하게 했다.
민심을 다지고 개혁을 준비한 초반 통치
광종은 즉위 초반 정국을 지켜보면서 왕권을 강화할 기반을 마련했다. 당 태종과 신하들의 정치 토론을 담은 《정관정요》를 읽으며 군주의 통치 방식과 신하를 다루는 방법을 익혔다. 950년에는 중국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광덕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표했으며, 장청진과 위화진에 성을 쌓았다. 이후 후주가 중원의 강국으로 떠오르자 951년 12월부터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며 거란과 여진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 관계를 이어갔다.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에는 불교와 구휼 정책을 활용했다. 951년에는 개성 남쪽에 대봉은사를 세워 태조의 명복을 빌었고, 동쪽에는 신명순성왕후를 위한 불일사를 세웠다. 954년에는 숭선사를 창건했으며, 화엄종 승려 균여가 주장한 성상융회 사상을 받아들여 화엄종과 법상종의 융화를 추진했다. 가난한 사람과 병자를 돕는 제위보도 설치했다. 광종에게 비판적이었던 최승로도 신분이 낮은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어려운 이들에게 혜택을 베푼 초기 통치를 태평성대로 평가했다.
노비안검법으로 흔든 호족의 기반
956년 시행된 노비안검법은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의 신분을 조사해 양인으로 되돌리는 제도였다. 당시 호족이 소유한 노비 가운데에는 고려의 통일전쟁 중 포로가 됐거나 호족의 강압으로 신분을 잃은 양인이 많았다. 이들은 호족의 농업 생산과 세금 수입을 떠받쳤을 뿐 아니라 사병을 구성하는 인력도 됐다.
노비는 자신이 과거에 양인이었다고 관아에 신고해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광종은 호족이 노비의 관청 출입을 막지 못하게 했고, 거짓 신고라고 무고하는 호족에게는 불이익을 줬다. 대목왕후까지 반대에 나섰지만 광종은 시행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호족은 경제 기반인 노비의 상당수를 잃었고 사병의 수도 크게 줄었으며, 양인이 된 사람들은 국가에 조세와 부역을 부담하게 됐다. 국가 재정과 병력 기반은 넓어졌으며 왕권은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부작용도 있었다. 옛 노비와 주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신분 질서가 흔들리면서 사회적 토대가 흔들리는 양상도 일부 나타났다. 광종의 근위 세력과 호족 세력이 충돌해 정계가 혼란해지기도 했다. 이후 호족의 힘이 다시 커지자 성종은 노비환천법을 시행해 양인으로 회복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을 다시 노비로 돌렸다.
과거제와 관복으로 세운 새로운 관료 질서
광종은 후주 사신단을 따라 고려에 온 쌍기의 학식과 개혁 성향을 높이 평가해 후주 세종의 승낙을 받고 신하로 삼았다. 시험을 담당하는 관직을 지냈던 쌍기는 과거제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광종은 쌍기를 비롯한 후주 출신 귀화인과 새롭게 선발할 관료를 통해 호족을 견제하려 했다.
958년 5월 광종은 쌍기를 지공거로 임명하고 고려 최초의 과거를 시행했다. 시·부·송·책을 시험해 진사 갑과 2명, 명경과 3명, 복업과 2명을 뽑았으며, 진사 갑과의 첫 합격자는 최섬과 진긍이었다. 960년에는 시·부·송으로 시험했고, 964년에는 사회 현실과 개혁 방안을 논하는 시무책을 시험 과목에 포함했다. 승려를 선발하는 승과도 마련해 선종선과 교종선을 운영했다.
과거제는 가문과 무력을 바탕으로 관직을 장악하던 호족에게 정치적 타격을 줬다. 시험으로 선발된 신진 관료들은 기존 인맥과 배경이 약했기 때문에 광종의 새로운 정치 기반이 됐다. 광종은 전국에 학교와 학문을 장려하고 문치적 관료체제를 세우려 했으며, 과거로 뽑힌 인재들을 측근으로 발탁했다.
960년에는 관리의 지위에 따라 관복 색을 나누는 제도를 확립했다. 원윤 이상은 자색, 중단경 이상은 붉은색, 도항경 이상은 진홍색, 소주부 이상은 녹색 옷을 입게 했다. 재산에 따라 복장이 달라져 관료의 서열이 흐려지는 문제를 바로잡고, 왕을 중심으로 조정의 질서를 체계화하려는 조치였다. 같은 해에는 개경을 황도라고 부르고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으며, 963년 12월부터는 송나라 연호를 사용했다.
강력한 개혁이 남긴 성취와 그늘
광종의 정책은 호족의 경제적·군사적·정치적 기반을 약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세우는 토대가 됐다. 이제현은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에 대해 “광종이 본래 문(文)의 전아함을 가지고 풍속을 변화시키려 했던 뜻을 보았음이 있고서 쌍기 역시 그 뜻을 받들어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니,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과거제는 시험을 통한 관료 등용을 본격적으로 정착시켰고,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할 길을 열었다.
그러나 광종은 왕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호족과 공신뿐 아니라 왕족까지 가혹하게 숙청했다.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이복동생 효은태자가 처형됐으며 장남인 태자 주도 의심을 받았다. 귀화인을 지나치게 우대해 고려 관료들의 반발을 불렀고, 960년 준홍과 왕동의 역모 혐의 사건 뒤에는 죄 없이 희생되는 사람도 늘었다. 개혁이 중앙 정계 개편에 집중돼 지방제도와 폭넓은 경제·사회 제도의 정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비판도 남았다.
광종은 975년 개경 황궁에서 세상을 떠났고 헌릉에 묻혔다. 그는 노비안검법으로 호족의 인력과 재산 기반을 흔들고, 과거제로 관직 진출의 새로운 통로를 마련했으며, 관복 제도로 조정의 위계를 정비했다. 동시에 숙청과 정치적 불안을 남긴 군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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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광종 (고려)」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