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도〉와 〈날개〉를 남긴 이상은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있던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시인이자 소설가다. 건축과 미술에도 발자취를 남긴 그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1910년 9월 23일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에서 김연창과 박세창의 2남 1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강릉 김씨다.
아버지는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 손가락을 잃은 뒤 이발관으로 생계를 이었다. 이상은 1913년부터 백부 김연필의 집에서 자랐다. 백부는 학업을 지원했지만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 기대하며 엄격하게 대했다. 백부의 새 아내 김영숙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문경과 이상을 차별했다.
1917년 신명학교에 입학하면서 평생의 친구가 된 화가 구본웅을 만났다. 동광학교를 거쳐 보성고보에서 공부하며 화가를 꿈꿨고, 1925년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이 입선했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에 진학해 192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기념 사진첩에 쓴 ‘이상’이라는 이름은 구본웅이 선물한 오얏나무 화구상자에서 비롯했다는 증언이 있다.
건축 기수의 문학 데뷔와 병고
학교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가 된 이상은 1929년 11월 관방회계과 영선계로 옮겼다. 조선건축회 정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공모에서 1등과 3등에 당선됐다. 1931년에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양화 〈자상〉을 입선시키며 미술 활동도 이어갔다.
문학 데뷔는 1930년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 홍보 잡지 《조선》 국문판에 필명 이상으로 《12월 12일》을 2월부터 12월까지 9회 연재했다.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1931년에는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 시 〈이상한가역반응〉 등 20여 편을 세 차례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제목 아래 일본어 시들을 실었다. 소설 〈지도의 암실〉에는 비구, 〈휴업과 사정〉에는 보산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1931년 진단받은 폐결핵은 직장생활까지 흔들었다. 1933년 새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 속에 각혈이 심해지자 기수직을 내려놓고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 요양했다. 그곳에서 만난 금홍과 종로1가의 다방 제비를 운영하며 동거했지만, 경영난과 관계의 갈등이 겹쳤다. 1935년 금홍이 떠났고 그해 9월 다방도 문을 닫았다.
금홍과 권순옥, 소설에 남은 관계
금홍과의 갈등은 작품에도 등장한다. 이상은 금홍에게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났느냐고 몰아세웠다. 1936년 12월 발표한 〈봉별기〉에는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나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 보니까 금홍이는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 놓고 나가 버린 뒤였다.”라고 썼다.
이상은 부모의 집을 저당 잡혀 인사동 카페 쓰루를 인수하고 권순옥을 여급으로 데려왔다. 고리키 전집을 읽은 권순옥은 그의 외모와 생활태도, 작품세계에서 D.H.로렌스를 떠올리며 ‘D.H.로렌스의 모조품’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상은 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권순옥을 사랑한 친구 정인택이 자살을 기도하면서 관계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결국 권순옥과 정인택이 결혼했고 이상이 결혼식 사회를 맡았다.
1936년 6월 발표한 〈환시기〉에서 이상 자신은 ‘나’, 권순옥은 순영, 정인택은 송군으로 나타난다. 작품의 화자는 “나와 순영이 송군 방 미닫이를 열었을 때 자살하고 싶은 송군의 고민은 사실화하여 우리들 눈앞에 놓여져 있었다. 아로날 서른여섯 개의 공동(空洞) 곁에 이상(李箱)의 주소와 순영의 주소가 적힌 종잇조각이 한 자루 칼보다도 더 냉담한 촉각을 내쏘면서 무엇을 재촉하는 듯이 놓여 있었다. (…) 나는 코고는 ‘사체’를 업어내려 자동차에 실었다. 그리고 단숨에 의전병원으로 달렸다.”라고 서술한다.
15편에서 멈춘 오감도, 평단이 주목한 날개
1933년 이상은 문학단체 구인회의 핵심 동인인 이태준·정지용·김기림·박태원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정지용의 주선으로 《가톨닉청년》에 한국어 시 〈꽃나무〉와 〈이런 시〉 등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거울〉도 실었다. 일본어 시를 발표하던 건축 기수의 활동은 한국어 문학으로 넓어졌다.
1934년 이태준의 도움으로 시작한 〈오감도〉 연재는 독자와 충돌했다. 《조선중앙일보》에 7월 24일 〈시제1호〉가 실린 뒤 8월 8일 〈시제15호〉까지 발표됐지만, 난해한 표현에 대한 항의와 비난으로 중단됐다. 같은 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하융이라는 이름으로 삽화를 그렸다.
1936년에는 구본웅의 알선으로 창문사에서 일하며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 창간호를 편집·발간했다. 단편 〈지주회시〉와 〈날개〉는 평단의 관심을 끌었다. 〈날개〉에는 무기력한 남편과 매춘을 하는 아내가 등장하며, 아내의 이름 연심은 금홍의 본명이다. 연작시 〈역단〉 발표와 〈위독〉 연재까지 이어진 이 해는 그의 창작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변동림과의 결혼, 도쿄에서 끝난 생애
이상은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해 경성 황금정에 살림을 차렸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변동림은 구본웅의 이모였다. 가족의 반대에도 결혼했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그해 홀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상은 도쿄에서 신백수·이시우·정현웅·조풍연 등과 문학을 토론했고, 이듬해 〈동해〉와 〈종생기〉를 발표했다.
1937년 2월 일본 경찰에 사상 혐의로 체포돼 약 한 달 동안 구금된 뒤 폐결핵 악화로 풀려났다.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그는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찾아온 변동림과 재회했으나, 4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멜론이 먹고 싶소”였다.
변동림은 수필 〈월하의 마음〉에서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 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유해를 화장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한 그는 훗날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가는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이상을 기렸다.
문법을 흔든 실험과 오늘날의 기억
이상의 작품에는 문법을 깨뜨리는 문장과 수학 기호가 등장한다. 분명한 줄거리보다 인물의 내면을 앞세우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 무의식과 사회적 소외를 드러내는 서술도 두드러진다. 한국어 문학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형식 실험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동시에 〈오감도〉의 연재 중단은 그 실험이 발표 당시 독자에게 얼마나 난해하게 받아들여졌는지도 보여준다.
친구 박태원은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또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라고 적었다.
이상이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이유는 〈오감도〉와 〈날개〉를 비롯한 작품에서 기존 문학의 문법과 서술방식을 넘어서는 실험을 남겼기 때문이다. 문학사상사는 1977년 이상문학상을,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 세계》는 2008년 이상시문학상을 제정했다. 탄생 100주년인 2010년에는 생전 발표작과 사후 발굴작을 함께 살피며 그의 문학세계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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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이상 (작가)」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