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복에서 태어나 한성에서 학문의 길을 열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의 생애는 조선의 관료에서 대한제국의 언론인·개화운동가로, 다시 미국의 의사이자 한국 독립운동의 지원자로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으며 병리학자, 대학 교수, 시인과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본관은 대구, 자는 윤경, 호는 송재와 쌍경이었다. ‘피제손’이라는 이름과 오시아(N. H. Osia)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서로 다른 사회를 오간 그의 이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지식을 배우는 데 머무르지 않고 신문과 단체 활동으로 이를 나누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는 1864년 1월 7일, 음력으로는 1863년 11월 28일에 외가가 있던 전라도 동복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보성군에 해당하는 곳이다. 아버지는 진사 서광효, 어머니는 이기대의 다섯째 딸인 성주 이씨였으며, 그는 5남 2녀 가운데 셋째 아들이었다. 외가는 동복과 문덕의 대지주 가문으로,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외종조부 이기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어머니가 출산 전 뽕나무를 감은 큰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친가는 영조의 장인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후손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었다. 할아버지 서상기는 유복자로 가난하게 살았고, 아버지는 처가에서 10여 년을 지낸 뒤 고향 부근에 집을 마련했다. 가족은 충청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를 거쳐 금곡리로 옮겼고, 서재필은 오늘날 논산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곱 살에는 아들이 없던 아버지의 6촌 형제 서광하의 양자가 되었다.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양부의 관직 생활을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 김씨 김온순의 딸이자 김성근의 누나였다.
경전을 외우던 소년, 새로운 세계를 만나다
아버지가 처음 붙여준 이름은 쌍경이었다. 뒤에 재필로 바꾸었지만 그는 쌍경을 첫 아호로 사용했다. 어린 시절 외가에 갔다가 부임하던 수령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일화가 전한다. 어른들도 가까이 가기를 어려워했지만, 그는 수령에게 부채를 빌려 달라고 청하고 그 부채로 장단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름을 묻자 아버지의 진사 급제와 자신의 출생이라는 두 경사가 겹쳐 쌍경이라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의 소년기는 당당함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키가 크고 힘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으며 자존심도 강했다.
1872년 양부모는 그를 한성에서 이조참판으로 있던 김성근의 집에 보내 공부시켰다. 서재필은 그곳에 머물며 《동몽선습》과 《사기》, 사서와 육경을 배웠다. 대부분 암송했지만 뜻을 이해한 부분도, 우선 외워 둔 부분도 있었다고 한다. 경전을 읽고 외우는 공부는 관리 선발 시험인 과거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김성근의 집은 새로운 인연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집안에 드나들던 서광범과 김옥균을 만났고, 김옥균의 소개로 세 살 위인 박영효와도 사귀었다. 김옥균은 자신보다 열두 살 어린 서재필을 동생처럼 각별히 대했다.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오경석·유대치의 문하에도 출입했다. 그곳에서 수학과 함께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접했다. 생가와 양가는 모두 노론 계열이었으나, 그는 이 시기에 노론 북학파의 영향을 받으며 개화파 형성에 참여했다. 1879년 초 진사시에는 낙방했지만, 그해 봄 고종이 직접 주관한 전강에서 1등을 차지했다. 시관이 사서삼경의 대목을 지적하자 막힘없이 일곱 번 되풀이해 외웠다고 한다. 그 결과 곧바로 과거의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받았다.
젊은 관료의 개화 공부와 일본 군사 유학
서재필은 1879년 네 살 연상의 경주 이씨와 혼인했고, 1881년 봄에는 김영석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했다. 두 번째 부인은 김장생·김반·김집·김익훈의 후손이었다. 1882년 3월에는 열여덟 살에 증광 문과 병과 3위로 급제했다. 그러나 곧바로 안정적인 관직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4월 6일 승문원가주서에 임시 임명되었다가 교체되었으며, 18일 다시 같은 직책을 맡았다. 19일 박영교의 상소로 군직에 임명되고, 21일 부사정이 되어 경연가주서를 겸했다. 25일에는 병으로 승문원가주서에서 교체되었다.
그해 6월 경서 인쇄와 관인 관리를 담당하는 교서관의 부정자가 되었다.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에 가입했으며 이 모임은 개화당으로 발전했다. 박영효·홍영식·윤치호·이상재·박정양·유길준 등과의 교류도 이어졌다. 한성 서대문의 봉원사는 개화파가 결속하던 장소였다. 주지 이동인은 일본어를 알고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했으며, 일본에서 서양 문물 관련 서적을 들여왔다. 그가 구해 온 역사·지리·물리·화학 책과 사진, 성냥은 서재필의 관심을 끌었다. 서재필은 친구들과 책을 보러 다녔고, 동대문 밖 영도사로 자리를 옮겨 남몰래 탐독하기도 했다.
1883년에는 승정원 가주서와 승문원 관직을 거쳐 3월 6품으로 특별 승진하고 훈련원부봉사가 되었다.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김옥균의 권유에 따라 평민 출신 청년 14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학생 대표였던 그는 5월 게이오 의숙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몇 달 만에 통역 없이 지낼 정도로 익혔고, 일본 체류 미국인들에게 기초 영어도 배웠다. 군사 시설과 경찰 제도를 살피는 한편, 동기생 이규완에게 택견을, 임은명에게 조르기와 누르기 등 유술을 배웠다. 공부의 범위가 경전에서 언어와 제도, 신체 훈련으로 넓어진 것이다.
군사 개혁의 좌절에서 독립신문 창간으로
1884년 1월부터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과 제식훈련, 폭탄 투척 등 신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에 솔선수범한 모습은 그해 2월 28일자 《지지신보》에도 소개되었다. 귀국한 서재필과 사관생도들은 6월 20일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 설립을 청하고, 병조 아래 조련국을 두어 그를 사관장으로 삼자고 건의했다. 고종의 승낙으로 조련국이 만들어졌지만 양어머니의 사망으로 서재필은 관직을 사퇴했다. 6월 30일에는 상중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도록 하는 고종의 명을 받아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그러나 장교 양성을 위한 시도는 이어지지 못했다. 조련국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폐지되었다.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일족이 군대 통솔권을 장악하고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면서 서재필은 군에서 밀려났고, 사관생도들과 함께 궁궐수비대에 편입되었다. 1884년 그는 김옥균·홍영식·윤치호·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정변은 사흘 만에 끝났다. 이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젊은 관료의 개혁 시도는 실패와 망명을 거쳐 전혀 다른 삶으로 이어졌다.
다시 한국에서 활동할 기회는 1895년 찾아왔다. 김홍집 내각이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하자 귀국했고, 이듬해인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개화운동가로 알려졌지만, 신문 창간은 대한제국이 성립하기 전 조선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의 활동은 이처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가로지른다. 군사훈련과 관직을 통해 개혁에 참여했던 사람이 이제는 신문 발행을 맡았다. 이는 그의 활동 수단이 군사·행정의 영역에서 언론으로 확장된 전환으로 볼 수 있다.
독립협회의 토론과 국외에서의 독립운동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에 이어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신문을 발행하는 일과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단체를 조직하는 일이 같은 해에 이루어졌다. 그는 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를 이끌었으며, 상소와 집회·시위에도 나섰다. 상소는 임금에게 의견을 올리는 방식이었다. 기존의 정치적 의사 전달 방식에 공개 토론과 강연, 집회가 더해진 셈이다. 독립협회 활동을 단순히 단체 설립이라는 한 가지 성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임의 운영과 의견 제시, 공개적인 행동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가 소개한 핵심 주제에는 민주주의와 참정권이 있었다.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알리고, 신문물을 견학하기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자신이 일본에서 언어와 군사훈련을 배우고 여러 제도를 살폈던 경험과도 연결해 읽을 수 있는 행적이다. 다만 언론과 협회를 통한 개화운동은 대한제국 정부의 견제를 받았다.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정부에 의해 추방된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로 활동했다. 신문 창간과 협회 설립으로 넓어졌던 국내 활동은 중단되었지만,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1910년 한국이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이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의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뒤에는 지원을 본격화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의 어려움을 겪었다.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의사로도 일했다는 사실은 그의 국외 활동이 생활의 부담과 떨어져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41년 태평양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했다. 미국에서의 의료 활동과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그의 생애 후반을 함께 이루는 두 축이었다.
광복 뒤의 귀환, 그리고 오늘 기억하는 이유
광복 뒤 서재필은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요청으로 다시 귀국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한 그는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정부의 최고고문을 맡았다. 조선의 젊은 관리였던 때,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이끌던 때와는 다른 자리에서 한국의 정치에 관여한 것이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도 있었으나 그는 사양했다. 자료에 나타난 그의 선택은 후보 추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까지이며, 그 동기를 별도의 말이나 일화로 덧붙일 필요는 없다. 1948년 그는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1951년 1월 5일 서재필은 미국에서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에는 갑신정변의 실패, 망명과 시민권 취득, 귀국 뒤의 언론·단체 활동, 추방, 독립운동 지원과 의료 활동이 거듭 교차했다. 사후인 1977년 11월 30일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는 그에 대한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기림을 보여준다. 그의 삶을 살필 때에는 이러한 공적 인정과 함께, 개혁의 좌절과 경제적 곤란도 같은 생애의 일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서재필을 기억하는 이유는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라는 이름을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간 신문을 창간하고, 토론과 강연을 이끌며,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하고, 국외에서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구체적인 행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 개혁을 이루는 방식이 관직과 군사훈련에만 머물지 않고 언론, 공개적인 의견 교환, 국외의 지원 활동으로 넓어지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실패와 추방을 지우지 않고도, 지식을 배우고 사회에 전하려 했던 그의 실천은 충분히 기억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