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소년, 나라를 걱정하는 학문을 배우다
최익현의 생애에는 임금에게 올린 상소와 외세에 맞선 의병 활동이 함께 놓여 있다. 철종과 고종의 치세에 관료로 일한 그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충청도 신창현감과 호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낸 관료의 길은 대마도 유배지에서 끝났다. 그 사이에는 권력자를 향한 비판, 개항과 개화에 대한 반대, 나라를 지키려는 무장 저항이 이어졌다. 그의 신념을 이해하려면 항일 의병장이라는 이름뿐 아니라 그 바탕이 된 성리학과 정치적 선택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는 1834년 1월 14일, 음력으로는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가범리에서 최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찬겸, 호는 면암이다. 처음에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다 하여 기남이라는 이름을 썼다가 뒤에 익현으로 고쳤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네 살 때 단양으로 옮긴 것을 비롯해 여러 지방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김기현과 이항로에게 배운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의 명에 따라 경기도 양근군 벽계에 은퇴해 있던 성리학자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항로에게서 배운 책은 《격몽요결》, 《대학장구》, 《논어집주》 등이었다. 학문의 기초와 함께 익힌 가르침은 ‘애군여부 우국여가’, 곧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라는 정신이었다. 이항로는 그에게 ‘면암’이라는 호와 학문을 권면하는 글을 주었다. 최익현은 수제자로 인정받았으며, 송시열과 송준길에서 권상하, 한원진과 이간, 이항로로 이어지는 노론 학맥의 정통으로 간주되었다. 이 문하에서 유인석과 김평묵이라는 평생의 동지도 만났다. 나라를 구하고 도리를 붙든다는 ‘구국부도’의 의리는 이후 그의 활동을 관통하는 기준이 되었다.
관직에 나아가 권력의 잘못을 묻다
1855년 2월 최익현은 춘당대에서 열린 강경에서 1등을 차지했다. 경전의 이해를 겨루는 이 시험의 성적으로 생원시나 진사시를 거치지 않고 그해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고,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승문원정자와 순강원수봉관을 거쳐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에서 일했다.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이조정랑, 신창현감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직책을 맡았다. 관리의 잘못을 비판하는 언관과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불의와 부정을 바로잡으려 했고, 강직함과 선정으로 칭송받았다.
처음부터 흥선대원군과 대립했던 것은 아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반대했던 그는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대원군이 노론을 견제하고 남인과 북인까지 등용하자 비판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여기에는 그가 속한 정치·학문 집단의 입장도 작용했다. 스승 이항로가 대원군을 지지하던 생전에는 비판을 자제했지만,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복궁 중건 정책에 반대하다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으며, 이후 성균관직강과 사헌부장령, 공조참의, 돈녕부도정 등을 지냈다.
1868년 상소에서 그가 지적한 것은 궁궐 공사의 구체적인 부담이었다. 대규모 공사에 비용과 인력이 투입되면서 생기는 자원 낭비,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생계 곤란, 당백전 발행에 따른 물가 상승과 재정 파탄을 문제 삼았다. 그해 10월에도 무리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사간 권종록은 이를 무례하다고 비판했지만, 고종은 10월 20일 그를 돈녕부도정으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여드레 뒤인 28일 사퇴했다. 1871년에는 만동묘를 비롯한 서원 철폐가 존주대의와 학문을 배우는 분위기를 해친다며 철폐령의 취소를 건의했다.
대원군의 실각과 타협하지 않은 상소
흥선대원군과의 대립은 1873년 결정적인 정치 사건으로 이어졌다. 시아버지 대원군을 권력에서 물러나게 하려던 명성황후는 사람을 보내 최익현과 교섭했다. 그해 10월 돈녕부도정으로 있던 그는 ‘계유상소’를 올려 고종이 이미 성년이므로 대원군이 섭정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임금을 대신해 정치를 맡던 대원군의 권한을 정면으로 문제 삼은 것이다. 고종과 민씨 일족은 이 상소를 적극 지지했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직접 정사를 주도하는 친정이 시작되었다. 최익현은 승정원동부승지로 기용되며 반대원군 세력의 앞자리에 섰다.
그의 비판은 대원군 한 사람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동부승지가 된 뒤에는 조정 대신들의 일 처리가 잘못되어 번잡하다고 상소했다. 좌의정 강노, 우의정 한계원, 영돈녕부사 홍순목 등이 사직 상소를 올렸고, 삼사에서는 최익현을 규탄했다. 고종은 오히려 상소를 높이 평가해 그를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영의정 이유원 등과 함께한 대원군 하야 운동은 대원군 계열 인사들에게 임금과 아버지를 이간하는 행위라는 비난을 받았다. 가선대부로 승진하며 신임을 얻었던 그였지만, 권력 재편의 중심에 선 만큼 거센 정치적 반발도 감당해야 했다.
최익현은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를 올려 민씨 일족의 잘못까지 비판했다. 상소가 과격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11월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은 뒤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거처 둘레에 울타리를 두어 활동을 제한하는 유배형이었다. 한편 그는 김평묵과 함께 윤휴, 이현일,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의 복권에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1873년부터 1876년까지 관련 상소를 거듭하며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반역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인과 노론의 적대 관계를 내세워 복권을 저지한 행적은 그의 강직함이 노론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배타적인 입장과도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선 개항 반대론자
대원군이 물러난 뒤에도 최익현과 집권 세력의 관계는 평탄하지 않았다. 민씨 정권이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다시 커졌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반대한 행동은 그의 위정척사운동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그는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병자척화소’를 올렸다. 개항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다섯 조항으로 제시한 ‘개항오불가’의 상소였다. 자신의 머리를 치고 가야 통상할 수 있다는 결연한 태도로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일본의 강압뿐 아니라 수교를 추진하는 정부의 방침에도 정면으로 맞선 행동이었다.
이 상소는 당시 개항 반대 상소 가운데서도 잘 지은 글로 손꼽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에 격렬히 반대한 최익현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고, 1879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도 통상이 확대되고 외세가 유입되자 위정척사론의 중심 인물로 저항을 이어갔다. 그의 위정척사는 성리학의 올바른 도리를 지키고 그에 어긋난다고 여기는 사상과 세력을 물리치려는 입장이었다. 공자와 맹자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고, 임금을 높이고 외부의 위협을 물리친다는 존왕양이의 의리를 나라를 지키는 실천과 연결했다.
개항 이후 외국 자본의 침투와 경제적 진출은 농촌경제에 타격을 주었고, 정치적·군사적 침략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전개는 외세의 침투를 경계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현실이 되었다. 정부의 개화 시책에 대한 비판 속에서 위정척사의 반일운동도 힘을 얻었다. 다만 그의 모든 반대가 곧 항일운동과 같은 뜻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서구 문물의 유입 자체를 나라를 타락시키는 원인으로 보았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도 크게 반발했다. 외세에 의존하는 세력을 비판하는 자주 의식과 기존의 유교적 질서를 지키려는 태도가 그의 사상 안에 함께 자리했다.
단발령에 맞서고 의병의 정당성을 밝히다
1894년 친일 정권의 성립과 함께 추진된 갑오개혁에 대해 최익현은 외세의 내정간섭이 부당하다며 성토했다. 이후 단발령을 비판한 ‘청토역복의제소’에서도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에 반발해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고종은 그를 의병 해산을 설득하는 선유위원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진회대죄소’를 올려 의병을 “모두 충성과 의리를 앞세운 백성들”이라고 불렀다.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선 이들의 거병은 정당하며 해산하거나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도 선유사의 직책을 받았지만 의병 해산을 설득하지 않았다.
1895년 12월 30일, 음력 11월 15일 단발령이 시행되자 그는 유림의 지도자들과 함께 반대했다. 신체와 머리카락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다는 유교적 원칙이 근거였다. 최익현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명령은 개인의 외모를 바꾸는 조치에 그치지 않았다. 부모에게 받은 몸을 보전해야 한다는 도리와 외세의 간섭에 굴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 겹친 문제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기도 한 그는, 강제적인 변화에 저항하는 유학자들의 뜻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1896년 초 유생들의 단발 반대 상소가 이어지자 내부대신 유길준은 최익현을 그 배후로 보고 체포를 지시했다. 순검 한 부대가 파견되었고, 그는 경기도 포천군 영평에서 붙잡혀 투옥되었다. 유길준이 직접 고시문을 보여주며 법령에 따라 단발을 강행하겠다고 하자 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항의했다. 유길준이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자르려 할 때에도 완강하게 몸부림쳤다. 이 말과 행동은 단발령에 목숨을 걸고 반발했던 당시 유학자들의 신념을 함축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태인의 의병에서 대마도의 마지막까지
1905년 을사늑약은 최익현이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906년 그는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했다. 상소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외세의 침투를 경고하던 유학자가 직접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의병은 곧 관군에게 패했고, 최익현은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노년에 이른 그의 항일 저항은 전투의 승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을사늑약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개적인 모집과 거병으로 맞섰다는 행적은 그를 대표적인 항일 의병장으로 기억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대마도에 도착한 날 그는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항의해 단식을 시작했다. 이후 대마도주의 사과와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했다. 따라서 그의 마지막을 단순히 끝까지 음식을 거부한 죽음으로만 설명해서는 생애의 구체적인 경과를 놓치게 된다. 그는 석 달 뒤 풍증이 발병했고 단식의 후유증까지 겹쳐 세상을 떠났다. 사망일은 1907년 1월 1일, 음력으로는 1906년 11월 17일이며, 전통적인 나이 계산으로 74세였다. 사후인 1928년에는 시호 없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이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이유는 권력의 잘못과 외세의 압력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백성의 생계를 위협하는 궁궐 공사를 비판한 상소,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에 맞서 그 정당성을 밝힌 글, 을사늑약 이후의 거병은 그 실천을 보여준다. 동시에 개화파를 반대하고 남인과 북인의 등용 및 복권을 저지했으며 고종의 황제 칭호 격상도 옳지 않게 여겼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는 모든 변화를 받아들인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은 질서 안에서 나라를 지키려 한 유학자였다. 그 신념의 역사적 제약과 항일 저항의 의의를 함께 살필 때, 최익현의 삶은 존경을 넘어 이해의 대상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