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金正浩)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다. 1804년 무렵 황해도 토산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도이고 청도 김씨 봉산파에 속한다. 호는 고산자(古山子)이며, 자는 백원(伯元·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로 전한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으며, 지도 제작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몰락한 양반 계층인 잔반이나 중인 출신으로 추정된다.
한양으로 이주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와 안면이 있던 한세진의 증언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는 남문 밖 약현에 남아 있던 옛 집터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다고 기록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것으로 보이며, 김정호의 지도와 지지에 나타나는 만리재·약현·남대문 밖 공덕리는 서로 가까운 곳이다.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에는 김정호가 ‘동관’의 나이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고 나온다. 이 나이는 18세나 19세로 추정된다. 지도가 땅의 형세를 그림으로 보여 준다면, 지지는 지역의 지리와 제도·문물 등을 글로 담는 책이다. 김정호의 작업은 이 두 가지를 함께 만드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청구도에서 대동여지도로 작업을 이어 가다
김정호는 1834년 순조 34년에 《동여도지》를 처음 편찬하고, 그 책에 딸린 지도에 해당하는 〈청구도〉를 펴냈다. 이어 1851년 철종 2년 무렵부터 1856년 사이에 《여도비지》를 편찬했으며, 1856년 무렵부터 1861년 사이에는 〈동여도〉를 편찬했다. 한 작품으로 끝내지 않고 지도와 지리서를 거듭 만드는 과정이었다.
대표작 〈대동여지도〉는 1861년 철종 12년에 나왔다.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완성한 지도다. 1834년의 〈청구도〉에서 1861년의 〈대동여지도〉로 이어지는 연대는 그의 대표작이 앞선 편찬 작업의 축적 위에서 탄생했음을 보여 준다.
그 뒤에도 지리서 편찬은 계속됐다. 김정호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착오를 바로잡고 빠진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32권 15책의 《대동지지》를 편찬했다. 1866년 고종 3년까지 이 작업을 이어 간 것으로 전하며, 1864년에 편찬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1866년 무렵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리라 여겨진다.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는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불린다. 그의 업적은 〈대동여지도〉 한 점에 머물지 않고, 그림과 글로 조선의 지리를 정리한 여러 저술에 걸쳐 있다.
지도와 지지를 나라 운영의 기초로 여기다
김정호는 자신에 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사상을 살필 수 있는 글로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이 있지만, 《지도유설》은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한 글이다. 자신의 지리 인식은 《동여도지》 서문에 드러난다. 그는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지지로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릴 수 있다고 보았으며, 둘을 나라를 다스리는 큰 원칙인 ‘치국의 대경’으로 여겼다.
그는 단군과 기자 이래 지도가 없었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었다. 또한 조선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면서 지리 기록이 뚜렷해졌지만, 자신이 살던 때에는 300여 년이 지나 실제 지리 정보와 차이가 커졌다고 판단했다.
《동여도지》는 그 차이를 바로잡으려는 작업이었으며, 편목과 구성은 《동국여지승람》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국가 운영에 유용하도록 국방 시설인 관방, 교통·연락을 위한 역참, 교육 기관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했다. 지리 지식을 교육과 국방을 비롯한 나라의 실무에 연결하려 한 것이다.
전국 답사설 너머에 수집과 연구가 있다
김정호는 조선 전역을 직접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었다고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참고했다는 점을 들어 전국 답사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관찬 지도는 관청에서 만든 지도이며, 가장지도는 지역의 유력 집안이 사사로이 만든 지도다. 가장지도는 대체로 소유한 임야와 농경지를 표시했고,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않았다.
유재건은 《이향견문록》에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라고 적었다. 이는 김정호가 답사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정상기·최한기·신헌 등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다.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 당빌이 프랑스 밖에 나가지 않고도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든 사례 역시 이와 비교된다.
역사학연구소가 저술한 《교실밖 국사여행》도 김정호가 답사로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논증한다. 조선 중앙정부가 행정의 편의를 위해 지도와 지리지를 많이 만들었고, 김정호는 기존 지리학 문헌을 연구하여 지도를 제작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논의는 그의 업적에서 지리 정보의 수집과 종합이 차지한 비중을 드러낸다.
옥사설과 지구전후도의 오해를 바로잡다
김정호가 흥선대원군에게 이적행위자로 몰려 딸과 함께 옥사했다는 이야기도 퍼졌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발행한 《조선어독본》에 ‘흥선 대원군은 완성된 지도가 외국에 알려질 경우를 두려워하여 수십 년 고생하여 만든 목판을 불태워 버리고 김정호와 그의 딸을 함께 옥사시켰다’고 기술했다. 이 이야기가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을 거부한 인물로 그리고, 한민족이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인식을 심으려는 식민사관에서 비롯됐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불태웠다는 지도의 판목은 남아 있으며, 김정호의 지도와 지지도 일부 멸실된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까지 전한다.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은 김정호의 오랜 지기이자 후원자였으며, 신헌이나 교유 인물 최한기가 처벌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에도 김정호의 투옥 기록은 없다.
《이향견문록》은 김정호의 죽음을 ‘몰’(沒)로 표현했으며, 죄인이 벌을 받아 죽는다는 뜻의 ‘물고’(物故)로 적지 않았다. 이 책에 죄인이 수록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도 옥사설에 대한 반론이다. 한편 신헌 등이 비변사와 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제공한 것으로 추측하여, 지도 제작을 사실상 조선 정부가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
〈지구전후도〉를 다시 간행한 사람이 김정호라는 설과, 그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이규경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 가운데 〈지구도변증설〉에는 중간자가 최한기라고 적혀 있다. 〈지구전후도〉는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는 판각을 맡았다.
고산자의 이름과 지리 지식의 유산이 남다
김정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에는 ‘95016 김정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의 고산자로도 그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지도 제작자의 이름과 호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사례다.
김정호가 기억되는 까닭은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지도와 지리서를 통해 땅의 형세와 지역의 제도·문물을 함께 정리했기 때문이다. 기존 기록의 착오와 빈틈을 고치고, 축적된 지리 정보를 나라 운영에 쓰려 했던 작업이 그의 생애를 관통한다. 지도 세 편과 지지 세 편으로 이어진 성과는 그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지리학자로 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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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김정호」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