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민영환, 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자유와 독립의 뜻을 남기다…한국사 인물

[독립운동가] 민영환, 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자유와 독립의 뜻을 남기다…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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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閔泳煥)은 1861년 8월 7일, 음력으로 7월 2일 서울 견지동에서 태어났다.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대신을 지낸 그의 생애는 왕실과 가까운 가문의 관료가 개혁을 모색하고, 끝내 일본의 간섭에 항거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본관은 여흥, 자는 문약이며 호는 계정과 사애다. 훗날 받은 시호 충정은 오늘날 그를 부르는 ‘민충정공’이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 그의 생애는 1905년의 순국에 앞서 관직 생활과 해외 사절 경험으로 이어진다.

그는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고모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이고 고숙은 흥선대원군이므로,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었다.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13촌의 먼 친척이었다. 또 다른 백부 민승호는 민겸호의 둘째 형으로 민치록에게 입적되었으며, 시호가 민영환과 같은 충정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민충정공이라는 호칭은 민승호보다 민영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민영환은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당시 권세를 누리던 민씨 척족, 곧 왕실과 혼인으로 연결된 친족 집단의 일원으로서 빠르게 승진하여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임오군란 때 생부 민겸호가 살해되면서 관직을 내려놓고 상을 치렀다. 4년 뒤인 1886년 이조참의에 제수되어 정계로 돌아온 그는 도승지와 이조참판, 예조판서와 형조판서, 한성부윤과 독판내무부사 등을 지냈다. 그의 초기 경력에는 가문의 후광과 격변이 남긴 개인적 상실이 함께 놓여 있었다.

해외에서 넓힌 시야, 정치 개혁과 민권을 말하다

1895년 8월 민영환은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미국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그해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사직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그는 낙향하여 두문불출했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여러 요직을 거쳤지만, 정국의 변화 속에서 물러나는 일도 거듭되었다. 이후 해외 사절로 활동하게 된 경험은 그가 다시 정치에 참여하면서 제시한 개혁 구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 그는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 여정에서 일본과 미국, 영국 등을 거치며 서구 문명을 처음 접했다. 귀국 후에는 의정부찬정과 군부 대신을 지냈고, 1897년 광무 원년에는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을 대상으로 하는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다시 해외로 나갔다. 한 나라의 행사에 참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국가를 방문한 이력은 그의 관료 생활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서양 문물을 접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의 제도를 본떠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하자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맞지 않았고, 제안 가운데 군사 제도 개편만 채택되었다. 고종은 원수부를 설치하여 육군을 통할하게 했다. 민영환은 1896년 독립협회도 적극 후원했지만,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다 수구적인 민씨 일파의 반감과 미움을 사 요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자신의 출신 가문과 개혁의 방향이 언제나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후 관직에 복귀한 그는 참정대신 등을 지냈으며 훈1등과 태극장을 받았다.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역임했고, 1897년에는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와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 대한제국 선포 이전의 여러 공적 역시 선포 후 태극장 수여의 근거가 되었다. 그의 개혁 활동은 정치 제도와 민권에 관한 제안, 군사 제도 개편, 독립협회 후원으로 구체화되었다. 그가 제안한 개혁 가운데 실제로 채택된 것은 군사 제도 개편이었다.

미국으로 이어진 외교 노력과 이승만의 보고

1904년 민영환은 한성부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이승만의 석방과 연계하여 고종의 뜻을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전하는 밀사 활동을 맡겼다. 이승만은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민영환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아칸소주 상원의원 휴 A. 딘스모어를 찾아갔다. 자료는 딘스모어가 과거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재직할 당시 민영환과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된 구체적인 경위까지 확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소개장은 미국 정계 인사와 접촉하는 통로가 되었다.

딘스모어는 이승만에게 당시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와의 면담을 주선했다. 중국에 관한 문호 개방 정책론자로 알려진 헤이와 이승만은 국무성에서 30분 동안 대화했고, 이승만은 호의적인 답변을 얻었다. 그러나 헤이는 얼마 뒤 지병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면담에서의 호의적인 반응을 곧바로 대한제국을 위한 구체적인 외교 성과로 확대해서 해석하기는 어렵다.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 앞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일본의 검열을 피하고자 딘스모어를 통해 외교 문서 우편으로 주조선 미국 공사에게 보내 전달했다.

보고에는 주미 조선 공사관의 인사에 관한 건의도 포함되었다. 이승만은 공사관 직원들과 장시간 면담한 뒤 신태무 대신 김윤정 참사관을 공사로 임명할 것을 민영환에게 제안했고, 얼마 후 신태무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905년 8월 10일 민영환은 결과와 관계없이 애국심으로 노력한 이승만과 윤병구를 치하하며 300달러를 보냈다. 이 일련의 기록은 그가 국내에서 상소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해외에 나간 인물의 활동을 지원하고 보고를 전달받으며 외교적 가능성을 찾았음을 보여준다.

을사늑약에 맞선 상소와 이천만 동포에게 남긴 말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 및 관료들과 여러 차례 대립했으며, 일본제국의 내정 간섭을 성토하다 주요 요직에서 밀려났다. 대한제국의 정치에 일본의 개입이 이어지는 가운데,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이를 크게 개탄했다. 조병세와 함께 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지만 일제 헌병들의 강제 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항거는 처음부터 죽음으로만 표현된 것이 아니었다. 조정에 반대 의사를 전달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상소가 먼저 있었다.

상소가 좌절된 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자결했다. 유서의 첫머리는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라는 위기의식으로 시작한다. 이어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이는 당시 그가 나라와 백성의 처지를 얼마나 절박하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라고 적었다. 그러나 유서는 임금에 대한 보답만을 말하지 않았다.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라고 한 뒤, 동포들에게 더욱 힘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또한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어서도 기뻐 웃겠다고 밝혔다. 마지막 문장은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였다. 그의 유언에는 절망의 진술과 함께 남은 사람들의 배움, 연대, 독립 회복을 향한 요청이 담겨 있다.

추증과 추모, 묘비와 충정로에 남은 이름

민영환은 사망 후 의정대신으로 추증되었다. 추증은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관직을 높여 내리는 일이다. 그는 종묘배향공신이 되었으며, 고종 사망 뒤에는 고종 황제의 능원에 배향되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묘인 ‘민영환선생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4에 있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친필로 쓴 묘비가 있다. 이 묘는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추모의 장소로 남았다.

이름을 기리는 방식은 무덤에만 머물지 않았다. 서울시는 1946년 10월 1일 그의 시호 충정을 따서 충정로라는 동명을 제정했다. 1994년에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자결 당시 살던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었다. 가족으로는 친동생 민영찬과 부인 반남 박씨 박수영, 세 아들 민범식·민장식·민광식이 있었다. 장남 민범식은 1899년에 태어나 1934년에 사망했다. 손자 가운데 민병기는 1927년부터 1986년까지 살았으며 고려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국가적 추모의 대상이 된 인물에게도 이러한 가족의 계보가 이어졌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혈죽’이라는 대나무 이야기도 전한다.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의 저서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에 따르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처한 조선을 걱정하며 그가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 불렀으며,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해 조작 여부를 의심하고 조사했다고 전해진다. 혈죽은 후손들이 보관해 내려왔다. 이 내용은 해당 저서가 전하는 이야기다.

충절의 기억을 넘어 개혁과 독립의 뜻을 읽다

1955년 11월 30일, 이승만은 민영환의 50주기 추념사에서 그의 삶을 길게 기렸다. 추념사는 국가의 흥망에 지도자와 민중 모두의 책임이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나라가 쇠망하는 때에도 충신과 의사가 역사의 빛나는 자취를 남긴다고 설명했다. 이승만은 고려 말 정몽주와 조선 말 민영환을 함께 거론하면서, 민영환이 어려운 시대에 후대가 기억할 기록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이는 1955년 추념사에 담긴 평가다.

이승만은 또한 민영환이 대대로 나라를 섬긴 가문의 인물로서 부국강병과 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방침들이 실패하고 정권이 쇠약해지는 상황을 맞았다고 회고했다. 여러 지도자와 함께 노력했지만 무너지는 큰집을 나무 하나로 바로잡지 못한 것에 비유하며, 그의 마지막 선택이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쳤다고 평가했다. 자신이 민영환의 소개장과 지원을 받았던 이승만의 추념에는 개인적 인연도 배어 있다. 추념사의 표현과 별개로, 그가 수행한 정책·외교 활동은 앞서 정리한 기록에 남아 있다.

민영환이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까닭은 을사늑약에 대한 항거와 더불어, 그에 앞서 이어온 개혁 및 외교의 노력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었던 그는 해외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 제도 개혁과 민권 신장을 제안했고, 독립협회를 후원했으며, 미국을 향한 외교 활동을 지원했다. 마지막 유서에서도 동포들에게 학문과 단결, 자유와 독립의 회복을 당부했다. 그의 생애를 기억하는 일은 죽음 자체를 본받는 데 있기보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 관료가 느낀 책임과 남은 사람들에게 전한 희망을 구체적인 행적 속에서 읽는 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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