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경장론과 십만양병설로 조선의 개혁과 국방을 논하다

이이, 경장론과 십만양병설로 조선의 개혁과 국방을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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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에서 태어난 조선의 신동

이이(李珥)는 조선(1392~1897)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1536년 12월 26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의 외가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덕수 이씨 이원수로 통덕랑과 사헌부감찰, 수운판관을 지냈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 신사임당이었다. 그는 부부의 셋째 아들이었다. 신사임당이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꾼 뒤 태기를 느꼈다고 하여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 별채의 방은 훗날 몽룡실이라 불렸다. 어린 시절 이름도 ‘현룡’이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뀌었다. 그는 이후 경기도 파주의 본가로 옮겨 생활했다.

이이의 집안은 학문과 관직의 전통이 깊었다. 아버지 이원수는 중종 때 형제 정승으로 이름을 알린 이기와 이행의 5촌 조카였다. 이기는 의정부영의정,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을 지냈다. 이원수는 승진을 위해 당숙이자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신사임당의 권고를 받아 그만두었다. 야사에서는 신사임당이 남편에게 이기의 집을 드나들다가 화를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전한다. 이기는 글을 잘 짓고 의정부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을사사화에 가담하고 권력을 남용한 일로 명종 말년에 관작을 삭탈당했다.

이이의 첫 스승은 어머니 신사임당이었다. 신사임당은 학문적 소양이 깊고 시문과 서화에 능했으며, 높은 덕과 굳은 절개를 지니고 시부모를 잘 섬긴 인물로 칭송받았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조광조 등과 가까웠고 기묘사화 때 의리를 지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아들이 없었던 그는 여러 딸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치고 공자·맹자·주자의 도리를 익히게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이이는 세 살에 글을 깨우치고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흉내 냈으며, 네 살에는 중국 역사책 《사략》 첫 권을 배우면서 스승보다 토를 더 잘 달았다고 전해질 만큼 일찍 재능을 드러냈다.

효심과 상실, 금강산에서의 방황

어린 이이에게 학문만큼 두드러진 모습은 부모를 향한 효심이었다. 다섯 살 때 신사임당이 병석에 눕자 외할아버지 신명화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한 시간씩 어머니의 회복을 기도했다고 한다. 행방을 찾던 가족들은 사당에 엎드려 기도하는 아이를 발견하고 탄복했다. 열한 살 때 아버지가 병들자 칼끝으로 자신의 팔을 찔러 흐르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여덟 살에는 화석정에서 가을 숲과 푸른 물, 붉은 단풍, 달과 바람,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기러기를 노래한 ‘팔세부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48년, 열세 살의 이이는 어른도 합격하기 어려운 진사 초시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의 학문은 빠르게 깊어져 열여섯 살 무렵에는 더 가르칠 것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고, 유교 경서뿐 아니라 여러 책을 두루 익히며 성리학을 연구했다. 스승 없이 조광조의 학문을 사숙한 뒤 조광조의 문하생인 휴암 백인걸을 찾아가 배웠다. 그 문하에서 만난 우계 성혼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시류의 타락을 논하며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맹세할 만큼 가까웠지만, 이이는 친구의 인물됨을 평가할 때도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지 않았다.

1551년 명종 6년, 열여섯 살이던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가던 중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다. 그는 파주 두문리 자운산의 묘소 곁에 묘막을 짓고 가족의 만류에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신사임당의 오랜 병환과 죽음은 삶과 죽음의 이유를 고민하게 할 만큼 큰 충격이었다. 더욱이 신사임당 사후에는 술주정과 행패가 심했던 서모 권씨로 인해 자녀들이 고통을 겪었다. 이이는 가출할 정도로 괴로워했지만 권씨에게 원한을 품지 않고 극진히 모셨다. 외할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의지했으나 외할머니도 곧 세상을 떠났다.

승려 석담에서 성리학자 율곡으로

묘막에서 독서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접하고 유교와 다른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3년상을 마친 1554년 명종 9년, 그는 금강산 마가연으로 들어가 ‘석담’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했다. 수행 중에는 생불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승려들 사이에 퍼졌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왜 태어나고 죽는지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승려 생활에서도 찾지 못했다. 마침내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그는 입산한 지 1년 만에 마가연을 떠나 환속했다.

산을 내려오며 남긴 시 ‘연비어약’에는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이치는 위와 아래가 같으며, 그것은 색도 공도 아니라는 구절이 담겼다. 이어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며 석양 아래 나무가 빽빽한 숲속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노래했다. 그는 불교의 무념과 무욕이 자신의 기질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1555년 스무 살에 금강산에서 내려온 뒤 다시 성리학에 몰두했고,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담아 《자경문》을 집필했다.

금강산 입산은 이이의 치열한 탐구 과정이었지만 정치적 공격의 빌미도 되었다. 생전에는 송응개 등 동인이, 사후에는 허목·윤휴·윤선도 등 남인이 그가 이단 학문에 빠졌거나 학자의 탈을 쓴 승려라고 공격했다. 동인·남인·북인 계열 유학자들의 이러한 사상 공세는 1910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스승 백인걸과 친구 성혼은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그를 문제 삼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이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제자를 가르친 백인걸 아래에서 공부하면서, 백인걸의 스승이자 자신의 사조인 조광조조차 급진적이라고 거침없이 비판했다.

아홉 번의 장원과 관료의 길

1558년 명종 13년, 스물세 살의 이이는 당시 쉰여덟 살이던 대학자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 그는 이황의 곁에 이틀 동안 머물며 학문과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토론했다. 두 사람은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키지는 못했지만, 이황은 젊은 이이의 학식과 달변에 감탄해 자신의 문인이 아닌 그를 두고 후생가외라고 평가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경공부, 격물, 궁리의 문제를 문답했다. 이황은 불교에서 벗어나 유교로 돌아온 이이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는 글도 보냈다.

한편 이이가 이와 기의 문제를 놓고 이황을 논파하려는 모습을 본 일부 문도들은 그를 기이한 인물로 여기며 적개심을 품었다. 훗날 조정에 진출한 이황의 문도 가운데에는 이이를 스승을 모욕하려 한 논적으로 규정한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이는 성혼과의 인연을 통해 대곡 성운과 남명 조식도 찾아가 사물과 이기론, 주자와 육구연의 학문을 논했다. 그의 학문은 한 스승이나 한 학파에 머무르지 않고 질문과 토론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이는 열세 살 진사 초시 장원을 시작으로 스물아홉 살까지 생원시와 별시, 식년문과 등 과거에서 모두 아홉 차례 장원급제했다. 이 때문에 ‘구도장원공’, 곧 아홉 번 장원한 사람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그가 거리를 지나가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이 지나간다며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1564년 명종 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호조좌랑이 되었고, 이어 예조좌랑으로 옮겨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왕실 외척 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저지르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고 윤원형을 관직에서 몰아내는 데 나섰다.

개혁과 국방을 함께 고민한 정치가

이이는 관직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서인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성혼·송익필·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서인의 종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인식에는 뼈아픈 반성도 있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해를 경고하는 유차를 올리자 이이는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했고, 이후에는 이준경의 처벌까지 상주했다. 훗날 당쟁이 현실이 되자 그는 자신의 판단을 크게 뉘우쳤으며, 동인과 서인 사이의 붕당을 조정하는 일을 평생의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그가 제시한 개혁은 백성의 부담과 국가 운영의 문제를 함께 바라보았다.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현물 대신 쌀을 거두는 대공수미법의 실시를 주장했고, 향약의 보급에도 참여했다. 조선 사회가 안정기에 들어선 뒤 오히려 제도와 기강이 흐트러졌다고 보고, 나라를 세운 초기의 초심으로 돌아가 사회를 개혁하자는 경장론을 제시했다. 성리학에서는 이와 기를 설명하는 이기일원론의 학문을 밝힌 업적으로 잘 알려졌다. 그의 학문은 관념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제도와 사회를 고치려는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졌다.

병조판서로서는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뒤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야 한다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이 주장으로 그는 훗날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다만 이이의 생전에는 그가 바라던 붕당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한을 남긴 채 1584년 2월 27일 세상을 떠났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관료로서 최고위급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개혁과 국방, 학문과 정치의 방향을 함께 고민했다는 점이 그의 생애를 특징짓는다.

논쟁을 넘어 문묘와 종묘에 남다

이이를 둘러싼 평가는 사후에도 정치적 논쟁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를 문묘에 종사할 것인지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약 50년 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에야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는 이언적·이황·송시열·박세채·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모두 이룬 여섯 현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이는 그가 성리학의 학문적 계보뿐 아니라 국가적 공훈을 기리는 기억 속에도 함께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이이의 삶은 한 방향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신동으로 불린 아이였고 아홉 번 장원한 수재였지만, 어머니의 죽음 뒤에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 방황했다. 금강산에서 승려가 되었다가 스스로 판단해 성리학으로 돌아왔고, 그 경험 때문에 오랫동안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친구 성혼의 장단점과 자신의 재주와 수양을 솔직히 비교했으며, 이준경을 공격한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깨달은 뒤에는 붕당 조정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처음부터 완성된 인물이 아니라 질문하고 선택하며 자신의 오류를 돌아본 학자였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날 이이가 기억되는 까닭은 십만양병설 하나에만 있지 않다. 그는 이기일원론을 밝힌 성리학자이자 구도장원공으로 불린 뛰어난 학자였고, 대공수미법·향약·경장론을 통해 백성의 부담과 사회 개혁을 고민한 관료였으며, 국방의 위험을 보고 군사력 확충을 주장한 병조판서였다. 동시에 붕당의 현실 앞에서 자신의 과거 판단을 뉘우치고 조정을 시도한 정치가였다. 학문을 현실과 연결하고 국가가 처음의 뜻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한 그의 문제의식은, 조선 중기의 한 인물이 왜 오랜 논쟁을 넘어 문묘와 종묘에 함께 이름을 남겼는지를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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