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시와 그림으로 조선 여성 예술가의 길을 열다

신사임당, 시와 그림으로 조선 여성 예술가의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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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에서 시작된 예술가의 삶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는 조선(1392~1897) 중기인 1504년 12월 5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에서 태어나 1551년 6월 20일까지 살았던 문인·유학자·화가·작가·시인이다. 본관은 평산이며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다. 외가이자 생가인 강릉 오죽헌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가족에게 아들은 없고 딸만 다섯이었으며, 인선은 그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선비 신명화, 어머니는 용인 이씨 가문의 선비 이사온의 딸이었다. 훗날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정치인이 된 율곡 이이와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도 그림과 서예, 시와 학문에서 독자적인 성취를 이룬 인물이었다.

그의 가계는 고려(918~1392)의 개국공신이며 왕건을 대신해 전사한 신숭겸으로 이어진다. 고조부 신개는 세종대왕 때 예문관 대제학·대사헌·도총제 등을 지냈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고도 낙방하다가 1516년, 41세의 나이로 한양에서 소과에 합격해 진사가 되는 데 그쳤다. 조광조가 등용되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시기에 신명화와 사촌동생 신명인은 신진 사류와 교류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신명인은 대전 뜰에 엎드려 중종에게 간하는 상소를 올렸고, 신명화도 유생들과 함께 있다가 붙잡혀 나흘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가 장인 이사온 내외를 모셨다.

신명화는 한성의 본가에서 처가의 도움을 받아 과거 공부를 이어가며 한 해에 몇 차례 강릉을 찾았다. 따라서 사임당은 한성에서 주로 생활한 아버지와 16년 동안 떨어져 지냈고, 그가 강릉에 올 때에야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신명화는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딸들과 조카딸들에게까지 글과 그림을 가르쳤다. 외조부 이사온의 학문 역시 냉철하고 소신 있는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해졌다. 출가 뒤에도 친정 부모와 함께 살았던 어머니는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다섯 딸을 교육할 수 있었다. 이렇게 외가의 학문적 전통과 아버지의 성리학 교육은 사임당의 지적 기반을 함께 만들었다.

일곱 살에 드러난 학문과 그림의 재능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 자매들보다 일찍 글을 깨우쳤고, 한학의 기본 서적을 빠르게 익혔다. 그가 지은 한시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일곱 살에는 외할아버지 이사온에게 부덕과 《소학》·《대학》·《가례》를 배웠다. 아버지에게는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을 비롯해 유교의 사서육경과 주자의 학문을 익혔다. 유교 경전과 좋은 책을 널리 읽은 그는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뿐 아니라 문장·고전·역사에도 해박해졌다. 훗날 아버지 신명화나 남편 이원수를 찾아온 사대부들까지 그의 학문적 소양에 탄복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술적 재능도 일찍 나타났다. 어머니가 자수 놓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하자 외할아버지는 그림에 대한 소질을 알아보았고, 일곱 살부터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했다. 교재로 마련해 준 것은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 안견의 산수화였다. 사임당은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려 주위를 놀라게 했으며, 특히 산수와 포도, 풀과 벌레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시와 그림뿐 아니라 서예에도 탁월했고, 자수와 바느질,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엄격한 어머니에게 부엌일과 살림도 배웠는데, 이를 빠르게 익히는 모습이 널리 알려질 만큼 솜씨가 좋았다. 예술과 학문이 일상의 기술과 분리되지 않고 함께 성장한 셈이다.

명종 때의 문인 어숙권은 어린 인선의 작품에 감탄해 자신의 저서 《패관잡기》에 평가를 남겼다. 그는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썼다. 이 평가는 사임당의 작품이 단순히 여성의 교양 활동으로 취급되지 않고 당대 회화의 기준 안에서 논의되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림을 가볍게 보거나 여성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어숙권의 문장은, 사임당이 이미 생전과 가까운 시대부터 주목받은 예술가였음을 전한다.

태임을 본받은 이름과 예술을 지킨 결혼

사임당은 자신의 호를 직접 지었다. ‘사임(師任)’은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이었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을 삶의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후대에는 여성임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별채를 뜻하는 ‘당(堂)’을 붙여 사임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별호도 사용했으며, 결혼한 뒤에는 본명보다 사임당·임사재·인임당 등의 호로 불렸다. 후대 작가 오귀환은 사임당이라는 호에 혁명을 꿈꾸는 여성으로서의 기상이 담겼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아버지 신명화는 덕수 이씨 이기·이행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를 사위로 정했다. 이원수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독자로 자랐으며, 당시 뚜렷한 관직도 없었다. 두 당숙이 영의정과 좌의정 등을 지낸 고관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으므로 주변에서는 신명화가 사윗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신명화가 우선한 조건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의 서화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가였다. 권문세가에서는 새 며느리의 그림 활동을 인정받기 어렵고, 지나치게 가난한 집에서는 살림에 매여 그림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원수는 돈령부사 이명진의 4대손이었고, 할아버지 이의석은 최만리의 사위로 현감을 지냈으며, 증조부 이추는 대제학 윤회의 사위로 군수를 지냈다. 무엇보다 편모 슬하의 독자여서 사임당에게 시집살이를 요구할 가까운 가족이 적고, 친정에서 생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신명화의 기대와 맞았다. 1522년 8월 20일 사임당은 이원수와 혼인했다. 사위가 처가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계속 살다가 뒤에 서울로 옮겼다. 유교 규범이 강했던 조선에서 일반 가정의 부인이 집안일 대신 예술적 재능을 펼치기 어려웠지만, 친정 거주와 남편·시어머니의 동의는 그가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강릉과 파주를 오간 딸·아내·어머니

혼인 몇 달 뒤인 그해 말, 아버지 신명화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은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친 뒤 한성으로 올라갔으며,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을 오가면서 홀로 남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한성과 강릉을 왕래하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두 지역의 중간 지점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 거처를 마련해 여러 해 살기도 했다.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뒤 이를 회복하고자 이원수 집안의 옛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한 적도 있다. 친정을 떠나며 홀로 있는 어머니와 고향을 생각해 지은 시들은 후대에 그의 대표작으로 전해졌다.

이원수는 아내의 자질을 인정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대화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언제나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사임당은 남편에게 과거 공부를 위해 10년 동안 떨어져 지내자고 약속한 뒤 좋은 산을 알아보아 보냈다. 이원수가 아내를 보고 싶어 다시 돌아오자 결단력이 없다고 나무랐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는 뜻으로 학문에 정진할 것을 압박했다. 결국 이원수는 3년 만에 공부를 단념했고,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채 음서로 관직에 나아갔다. 이러한 모습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던 전형적인 성리학적 부인관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임당은 이원수와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두었다. 셋째 아들 이이는 이름난 성리학자이자 정치인이 되었고, 조선 중·후기 서인과 노론의 사상적 시조로 평가되었다. 넷째 아들 이우는 관직이 정3품에 머물렀으나 시와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장녀 이매창도 시와 그림에 뛰어나 ‘작은 신사임당’ 또는 ‘소사임당’이라 불렸다. 사임당이 어린 자녀들을 남기고 일찍 병사한 뒤에도 자녀들이 학문과 문예에서 명성을 얻었다는 사실은 그의 교육적 영향과 가정의 학문·예술 환경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평가받는다.

대관령에 남긴 그리움과 오늘의 기억

사임당은 33세 때 아이를 낳기 위해 고향 강릉으로 내려갔고, 이때 태어난 아이가 훗날 대학자가 된 이이였다. 1537년 이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한성으로 돌아가던 길에는 대관령 고개에 이르러 멀리 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라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고향을 떠나는 딸의 시선과 노모를 두고 가는 마음을 구체적인 풍경 속에 담아 후대에 남녀노소가 폭넓게 애송했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꿈속에서도 돌아가고 싶은 천 리 밖 고향과 한송정의 외로운 달, 경포대 앞을 지나는 바람, 모래톱에 모이는 갈매기와 바다 위를 오가는 고깃배를 그렸다. 마지막에는 언제 강릉 길을 다시 밟아 색동옷을 입고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이 시들에서 강릉은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어머니와 외가의 학문, 어린 시절의 예술 교육이 함께 자리한 공간으로 나타난다. 38세에는 한성부에 새집을 마련하고 연로한 시어머니 홍씨와 함께 살았으며, 살림을 맡아 시어머니를 보살폈다.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오랜 세월 계속되었다.

사임당은 동시대 여성인 문정왕후·정난정·황진이·장녹수 등과 비교되며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존경받아 왔다. 그러나 그의 실제 생애는 자녀를 훌륭히 키운 어머니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성리학과 도학, 고전과 역사에 해박한 문인이었고, 산수·포도·풀·벌레를 능숙하게 그린 화가였으며, 서예와 한시, 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뛰어난 창작자였다. 2007년에는 한국 여성계와 주요 단체들의 집단 반발 등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그를 5만 원권 지폐의 인물로 도안했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이며, 대한민국 정치인 해공 신익희는 14대 방손이다.

오늘날 신사임당이 기억되는 이유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여성의 예술 활동이 제약받던 조선 사회에서 그는 가족이 마련한 교육 환경과 자신의 뛰어난 기억력·학문적 노력·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문인과 화가의 길을 이어 갔다. 동시에 강릉의 친정어머니와 파주의 시댁을 오가며 부모와 시어머니를 돌보고 일곱 자녀를 길렀다. 그의 그림을 두고 “안견의 다음”이라는 평가가 나왔고, 고향과 어머니를 그린 시가 오랫동안 애송되었다는 사실은 그를 독립적인 예술가로 바라보게 한다. 학문과 예술, 가족에 대한 책임을 함께 감당한 그의 생애는 조선 여성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역사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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