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토산군 출신 김정호, 한양 남문 밖에 살다

황해도 토산군 출신 김정호, 한양 남문 밖에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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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환경에서 지리학의 길을 찾다

김정호(金正浩, 1804년 무렵~1866년 무렵)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다. 조선은 1392년부터 1897년까지 이어진 왕조로, 김정호가 활동한 19세기는 그 역사의 후기에 해당한다. 그의 자는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로 전하며, 호는 고산자(古山子)였다. 본관은 청도이고, 황해도 토산군에서 태어났다. 청도 김씨 봉산파 출신인 그는 가정 형편이 빈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 제작에 필요한 지식과 활동을 고려해 몰락한 잔반, 곧 양반의 지위와 생활 기반을 잃은 계층이나 중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정확한 신분을 단정할 수 있는 자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가 언제 고향을 떠나 한양으로 이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양으로 옮긴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는 증언이 전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었던 한세진의 대인 증언을 근거로 한 내용이다. 1925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의 옛 집터가 남아 있던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것으로 보이며, 만리재와 약현, 남대문 밖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서로 가까운 곳으로 확인된다. 거주지를 둘러싼 기록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가 한양 남문 밖 일대를 생활 기반으로 삼았다는 모습은 비교적 일관되게 나타난다.

젊은 관심이 평생의 작업으로 이어지다

김정호가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매우 이른 때였다.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에는 그가 ‘동관’의 나이부터 지도와 지지에 뜻을 두었다고 적혀 있다. 동관은 대체로 18세나 19세로 추정된다. 여기서 지도는 땅과 공간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지지는 지역의 지리 정보를 글로 정리한 기록을 가리킨다. 김정호에게 두 작업은 서로 떨어진 별개의 분야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시작된 관심은 한때의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여러 지도와 지리서를 거듭 편찬하고 보완하는 평생의 과업으로 발전했다. 자신에 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은 인물이기에, 오늘날 그의 삶은 주로 그가 완성한 저술과 지도, 주변 인물의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편찬 활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1834년, 순조 34년부터다. 이때 김정호는 지지인 《동여도지》를 제1차로 편찬했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냈다. 글로 정리한 지리 정보와 그것을 공간적으로 보여 주는 지도를 함께 마련한 것이다. 이후에도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1851년, 철종 2년 무렵에는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했고, 1856년, 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했다. 《동여도지》와 〈청구도〉에서 시작해 《여도비지》와 〈동여도〉로 이어지는 흐름은 김정호가 한 번의 성과에 머물지 않고 지도와 지지를 지속적으로 정리해 나갔음을 보여 준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모인 노력

김정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업은 1861년, 철종 12년에 편찬한 〈대동여지도〉다. 이 지도는 아무런 선행 작업 없이 갑자기 등장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는 앞서 제작한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해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 지도에는 1834년 무렵부터 계속된 편찬과 수정의 과정이 축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지리 정보를 정리하고 지도를 만들며, 다시 새로운 지지와 지도를 편찬한 뒤 앞선 결과를 보완하는 방식이었다. 〈대동여지도〉는 이러한 연속적인 작업의 한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김정호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도 제작자로 기억되는 중심적인 업적이 되었다.

그의 관심은 〈대동여지도〉 완성 뒤에도 지지 편찬으로 이어졌다. 김정호는 1866년, 고종 3년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착오를 바로잡고 빠진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대동지지》를 편찬했다. 그 규모는 32권 15책이었다. 이 작업의 목적이 기존 지리지의 오류를 정정하고 내용을 보궐하는 데 있었다는 점은, 그가 이미 있는 기록을 그대로 되풀이하기보다 검토하고 보완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지도 제작과 지지 편찬을 함께 수행했던 그의 방식도 여기에서 다시 확인된다. 그는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1866년 무렵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 모두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남겨진 작업은 그의 생애가 지리 정보의 정리와 개선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지도와 지지를 하나로 바라본 지리학자

김정호는 자신의 생각과 삶을 직접 설명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는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이 꼽히며, 두 글 모두 김정호가 썼다. 그러나 《지도유설》은 온전히 개인의 생각만을 적은 글이라기보다 여러 사람의 견해를 듣고 정리한 글이다. 이에 비해 《동여도지》 서문은 그의 사상과 역사지리 인식을 보여 주는 자료로 여겨진다. 이 글에서 그는 지도와 지지가 서로 나눌 수 없는 관계라고 인식했다. 지도를 통해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실제 편찬 활동이 지지와 지도를 번갈아 만들고 함께 보완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인식은 단순한 주장에 머물지 않고 작업 방식으로도 나타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김정호가 기억되는 까닭은 유명한 지도 한 점을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하는 그는 젊은 시절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두었고, 《동여도지》와 〈청구도〉, 《여도비지》와 〈동여도〉를 거쳐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편찬과 보완을 계속했다. 자신에 대한 기록은 적지만, 그가 남긴 작업의 순서는 한 지리학자가 지식의 정확성과 완성도를 높이려 했던 과정을 보여 준다. 지도와 글로 된 지리 기록을 불가분의 관계로 바라본 관점, 앞선 성과를 다시 검토해 보완한 태도, 기존 지리지의 착오와 누락을 바로잡으려 한 노력 때문에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로 평가받으며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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