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1748년 12월 24일~1807년 10월 1일)은 조선 후기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실학자이자 문신·시인으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규정한 『발해고』의 저자다.
서얼의 제약 속에서 학문을 넓히다
유득공은 1748년 12월 24일 한성부에서 진사 유춘과 남양 홍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문화이며 자는 혜보와 혜풍, 호는 영재·영암·고운당 등이다. 증조부 유삼익과 외할아버지 홍이석이 서자였고 할머니 우계 이씨도 이서우의 서녀였기 때문에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서얼 신분이었다. 본래 남인 가계에 속했지만 박지원에게 배우면서 노론 북학파로 방향을 바꾸었다.
175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남양의 외가로 옮겼고, 1757년 어머니와 함께 한성 경행방 경운동으로 돌아왔다. 이후 숙부 유금의 영향을 받았으며 18∼19세부터 시를 익혔다. 20세가 넘은 뒤에는 박지원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이덕무·박제가와 만나 평생 교류했다. 한성부 교서관동에서 오랫동안 살며 그곳에 둔 집의 당호를 고운당이라 했는데, 교서관동은 운동이라고도 불리던 지역으로 훗날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2가 부근에 해당한다.
좋은 시를 쓰려면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문학을 두루 읽어야 한다고 여긴 그는 『삼국지』와 『수호전』을 비롯한 중국 고전을 폭넓게 탐독했다. 구하기 힘든 책은 빌린 뒤 직접 베껴 집에 두고 반복해 읽었다. 관심의 범위도 만주·몽골·타타르·이슬람·인도·베트남·라오스·미얀마·타이완·일본·류큐에서 영국·프랑스·네덜란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독서는 청나라만을 중심에 놓는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규장각에서 얻은 새로운 역사 시야
유득공은 자신의 시문을 『영재집』으로 묶었고, 1772년에는 역대 한국 시문을 편집한 『동시맹』을 내놓았다. 1774년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지만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 진출에는 제약이 있었다. 그는 벗들과 교유하며 시문과 역사 연구를 계속했고, 1777년에는 청나라 여행과 관련된 기행 및 현지 문인들의 작품을 담은 『중주십일가시선』을 출간했다.
정조가 서얼의 관직 진출을 허용한 가운데 유득공은 뛰어난 문장과 폭넓은 지식을 인정받아 1779년 7월 13일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되었다. 함께 발탁된 이덕무·박제가·서이수와 더불어 ‘규장각의 4검서’로 불렸다. 외직에 나가서도 검서 직함을 함께 지녔으며, 박제가·이덕무·이서구와는 한학 4가로도 일컬어졌다.
규장각은 유득공에게 궁중에 보관된 한국·중국·일본의 역사 자료를 접할 기회를 주었다. 여러 기록을 살핀 그는 신라에 치우친 역사 서술을 비판하고, 발해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다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키웠다. 박지원의 제자로서 이덕무 등과 함께 실사구시를 바탕으로 산업을 진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의 학문적 활동 가운데 하나다.
지방관과 여행자로 이어진 생애
정조의 신임을 받은 유득공은 서얼에게 가해지던 제약을 넘어 여러 관직을 맡았다. 1786년 포천 현감을 지냈고 제천군수와 1788년 양근군수, 광흥창주부와 사도시주부를 거쳐 1792년 가평군수를 역임했다. 말년에는 풍천도호부사에 이르렀다.
1800년 8월 18일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유득공은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했다. 그는 개성·평양·공주 등 옛 도읍지를 둘러보았고 두 차례 베이징에 다녀왔다. 여행에서 확인한 문물과 경험은 기행문·소설·역사서 저술로 이어졌다. 1807년 10월 1일 사망했으며,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송산리의 송산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현재 의정부시 송산동에 해당한다.
『발해고』가 바꾼 한국사의 범위
유득공의 대표적 성취는 발해를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로 파악하고 신라와 함께 한국사 안에 배치한 『발해고』다. 그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대씨가 고구려 유민이었으며, 발해의 영토가 본래 고구려 땅이었고 국가 구성에도 고구려인이 참여했다는 점을 근거로 계승 관계를 설명했다. 신라만이 삼국 이후의 역사를 통일했다는 관점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두 나라가 함께 존재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다.
그는 『발해고』 서문에서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의 계승을 내세운 고려라면 발해까지 아우르는 남북국사를 편찬했어야 한다는 비판이었다. 『발해고』에서는 발해의 옛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도 밝혔으며,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찾으려 했다.
그의 저술은 『경도잡지』·『고운당필기』·『발해고』·『사군지』·『이십일도회고시』·『영재집』·『앙엽기』로 이어진다. 『경도잡지』는 조선시대 시민의 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책으로 평가된다. 『이십일도회고시』는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 한국인이 세운 나라의 21개 도읍지를 다룬 43편의 회고시로, 각 도읍의 건설과 번영을 노래하며 민족의 주체 의식을 되새겼다. 그의 시는 청나라의 이조원과 반정균에게 재주와 기백이 활발하고 재능이 풍부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북방까지 확장한 역사 인식
유득공은 남방에 집중했던 시야를 북방으로 넓히며 한국사 연구의 대상 자체를 확장했다. 『발해고』의 내용은 오늘날의 학문 수준에서 높이 평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지만,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고 조선 역사의 일부로 다루려 한 시도는 발해사 초기 연구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뒤에 정약용과 한치윤의 연구가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유득공이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까닭은 시인과 관료에 머물지 않고, 기존 역사 서술에서 빠져 있던 발해를 찾아 한국사의 범위를 넓혔기 때문이다. 규장각에서 접한 국내외 자료, 여러 지역을 향한 관심, 옛 도읍을 직접 살핀 경험은 『발해고』와 『사군지』, 『이십일도회고시』 같은 저술로 남았다. 그의 작업은 신라와 발해가 함께 존재한 시대를 남북국 시대로 이해하는 역사 인식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같은 분야 최신 기사
출처
- 위키백과 「유득공」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유득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