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의 소녀 자영, 왕비가 되기까지
명성황후 민씨는 1851년 11월 17일,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 섬락리의 사저, 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이었다. 그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6대손이자,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이었다. 인현왕후는 민진후의 누이였으므로 명성황후에게 5대 고모뻘이 된다. 명문가의 계보를 이었지만 당시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정3품 사도시 첨정에 이른 뒤 만년에 여주로 내려가 선영을 돌보며 지냈다.
민치록의 전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취부인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가 있었으나 다른 형제들이 모두 죽고 자영만 남았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11촌 아저씨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왔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이었다. 명성황후의 생가 감고당은 민유중의 묘를 지키려고 세운 묘막집으로, 이후 민유중의 종손들이 관리했다. 민치록도 문음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 이곳에 살며 민유중의 묘를 지켰다. 오늘날 여주 나들목 인근에는 명성황후 생가 공원이 있으며, 생가 가까이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 임원준의 묘도 자리한다.
자영은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워 《소학》, 《효경》, 《여훈》 등을 즐겨 읽었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과정과 국가의 옛 제도에 밝았다고 전한다. 현재 그의 공부방 자리에는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가 세워져 있다. 1858년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후 여주 섬락리 사저를 떠나 한양의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살았다. 형제와 아버지를 잃고 의지할 친오라비도 없었지만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열여섯 왕비와 권력의 중심
1866년 조선 왕실은 고종의 왕비를 정하기 위한 간택을 시작했다. 그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월 15일, 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의 12세부터 17세까지 모든 처녀에게 금혼령을 내렸다.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이 열렸고, 자영은 김우근·조면호·서상조·유초환의 딸 등과 함께 재간택에 들었다. 3월 6일 삼간택에서 왕비로 결정되었으며, 3월 21일 고종이 운현궁에서 왕비를 맞아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을 거행했다.
왕비가 된 뒤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내리는 예에 따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민치록의 본부인 해주 오씨는 해령부부인, 생모 한산 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 혼인은 흥선대원군이 고종 즉위 전에 안동 김씨 김병학과 맺었다는 비밀 약속을 뒤집은 일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김병학 또는 김병문의 딸 가운데 한 사람을 둘째 아들의 배필로 삼기로 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고, 그 결과 대원군을 지지하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렸다. 왕비는 훗날 흥선대원군을 견제할 때 이들과 힘을 모았다.
입궁 초기의 처지는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했고, 가례 첫날에도 왕비의 처소가 아니라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1868년 4월 귀인 이씨가 고종의 첫아들 완화군 선을 낳자 흥선대원군도 모자를 총애했다. 왕비는 자신의 안전과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를 비롯한 친척들과 관계를 강화하고, 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대원군의 형 흥인군 이최응,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은 유림의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 점차 고종의 총애를 얻어 1871년 왕자를 낳았으나 아이는 항문 폐색으로 닷새 만에 죽었다. 왕비는 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었던 일을 의심했다.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퇴진
명성황후의 정치적 부상은 고종이 직접 국정을 다스리는 친정의 추진과 맞물려 있었다. 그는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조영하 형제, 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흥인군, 서원 철폐 과정에서 대원군에게 등을 돌린 유학자들과 교류했다. 대원군이 당쟁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자 이에 반발한 노론계 세력도 포섭했다. 특히 유림의 거두 최익현은 1873년 10월 국왕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되었다.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뒤에서 지원했고, 그는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에 올랐다.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움직임을 막았고, 그를 다시 호조참판으로 올렸다. 최익현은 같은 해 11월 흥선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다시 제출했다. 스물두 살로 성인이 된 국왕을 두고 계속 섭정할 명분이 약해진 상황에서, 명성황후는 고종과 논의해 운현궁에서 궁궐로 이어지는 대원군의 전용 출입문을 폐쇄했다. 이로써 11년 동안 이어진 흥선대원군의 간섭은 끝났고,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로 물러났다. 다만 그는 은퇴한 뒤에도 정치 복귀를 계속 모색하며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에 맞섰다.
1874년 2월 명성황후는 둘째 아들 이척, 훗날의 순종을 낳았다. 이척은 이듬해 2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같은 1874년에는 폭탄 테러로 양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부인 등 일가족 세 명이 폭사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는 설이 돌면서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했다.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밀어낸 뒤 민씨 친족을 기용해 세도정권을 되살렸다는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정치 활동은 고종의 친정을 이끌었다는 면과 왕비 친족 중심의 권력 기반을 확대했다는 면을 함께 지닌다.
문호 개방과 점진적 개화의 선택
명성황후는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차 개방론을 받아들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곧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조선은 외국에 문호를 열었고 일련의 개화정책이 시행되었다. 명성황후는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했으며, 노론 계열의 개화사상가 박규수를 발탁해 우의정에 등용했다. 대원군 집권기의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는 차례로 파면되고 유배되었다. 다만 개화파와 관계가 언제나 원만했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전했다.
궁중에서는 고종을 움직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흥선대원군이 부활시켰던 삼군부를 폐지했다.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와 일본에 보내 공업과 무기 제조법 등을 배우도록 했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전해지자 그 안의 연미론, 즉 미국과 연대하자는 구상을 접했다.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나라에 갈 때 비밀리에 불러 한미수교를 주선하고 후원해 달라고 청나라에 요청하도록 했다. 개화승려 이동인도 일본에 보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한미수교를 도와달라고 부탁하게 했다.
이러한 정책은 거센 반발도 불렀다.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하자 그 내용을 문제 삼은 유생들이 1881년 2월 척사 상소 운동을 일으켰다. 같은 해에는 흥선대원군의 주변 인물 안기영과 권정호 등이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왕으로 세우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려는 역모를 추진했으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재선과 안기영 등 주동자들은 투옥된 뒤 사형당했다. 명성황후의 개화는 친일 성향의 급진 개화파가 추진한 노선과는 거리를 둔 점진적 방식이었다. 개항과 신기술 수용을 추진하면서도 급진적인 친일 개화정책에는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가 따른다.
임오군란의 피신과 국제정세의 격랑
1882년 별기군과 구식 군대의 처우 차별을 계기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대원군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이 명성황후와 그 측근들을 위협했고 일본 공사관도 공격받았다. 난군이 궁궐로 들이닥치자 명성황후는 변장한 채 궁을 빠져나갔다. 무예별감 홍재희가 그를 자신의 누이이자 상궁이라고 둘러대고 등에 업어 탈출시켰으며, 대전별감 홍계훈의 도움으로 장호원의 민응식 집에 은신했다. 명성황후는 홍계훈의 누이로 행세해 도성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피신한 동안 궁궐에서는 흥인군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이 난군의 공격을 받았다. 특히 민겸호는 흥선대원군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군인들에게 살해되었다. 구식 군대의 추대로 다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찾지 못하자 그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까지 밟았다. 재정과 병권은 맏아들 이재면에게 맡겼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살아 있었고,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대원군의 재집권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자 조선을 둘러싼 힘의 균형은 다시 무너졌다. 명성황후는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이 때문에 그를 친청파 또는 친러파로 보는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어느 한 나라에 일관되게 의존했다기보다,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당시 이용할 수 있는 외세를 선택한 행보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의 주요 거처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지은 건청궁이었다. 이 건청궁은 훗날 그의 생애가 비극적으로 끝난 장소가 되었다.
을미사변과 사후에 받은 황후의 이름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는 주조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공모 아래 움직인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이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한 왕비의 정치 노선은 일본 측의 직접적인 폭력으로 중단되었다. 그는 조선의 왕비로 생을 마쳤으며, 살아서 대한제국의 황후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한 뒤에야 고종의 왕비였던 그는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이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명성황후’라는 이름은 이러한 사후 추봉과 시호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정치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함께 존재한다. 최익현을 비롯한 여러 세력을 결집해 흥선대원군의 장기 간섭을 끝내고 고종의 친정을 이끌었으며, 통리기무아문과 해외 사절 파견, 한미수교 지원 등 점진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했다는 평가가 있다. 반면 민씨 척족을 대거 등용해 세도정치를 부활시켰고, 청나라와 러시아에 의존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명성황후가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이유는 그의 삶이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수립으로 이어지는 격변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주의 빈곤한 명문가 출신 소녀는 왕비가 되어 국왕의 친정을 유도하고 개항과 개화, 군란과 정변, 청나라·일본·러시아가 충돌한 국제정세의 한가운데에 섰다. 그의 선택은 논쟁적이었고 정치적 한계도 분명했지만, 외세의 압력이 거세지던 시대에 왕실과 국가의 진로를 두고 적극적으로 움직인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외국 공사의 공모 아래 침입한 병사와 낭인들에게 시해된 최후는 당시 조선이 처한 주권의 위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명성황후의 생애는 존경이나 비판 어느 한쪽만으로 단순화하기보다, 개혁의 시도와 친족 정치, 외세 견제와 의존이 복잡하게 교차한 역사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