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만공, 간화선 전파와 조선불교 수호…한국사 인물

[현대] 만공, 간화선 전파와 조선불교 수호…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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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은 조선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로,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이며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다. 경허의 법맥을 이어 간화선 수행을 보급했고,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조선 불교를 지키려 했다. 1871년 음력 3월 7일 태어나 1946년 10월 20일 예산 전월사에서 입적했다.

태인에서 시작된 출가와 깨달음

만공은 1871년 음력 3월 7일 전라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이고 아버지는 송신통, 어머니는 김씨이며 본명은 송도암이다. 법명은 월면이고 만공은 법호여서 송만공 또는 월면 스님으로도 불렸다.

1883년 김제군 금산사에 갔던 만공은 불상을 보고 감동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군 동학사에 들어가 진암의 문하에서 행자로 생활했다. 1884년에는 경허의 인도로 서산군 천장사에서 태허를 은사로 출가했으며,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고 득도했다.

만공은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묻는 화두를 붙들고 홀로 참선했다. 1895년 아산군 봉곡사에서 새벽 범종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전한다. 천장암에 머물던 그는 1904년 경허에게 전법계를 이어받았고, 이후 예산군 덕숭산에 금선대를 세워 후학을 지도했다.

화두와 무심을 앞세운 선 수행

만공이 택한 수행법은 간화선으로, 이론과 사변은 철저히 배제한 채 무념·무심의 자세로 화두를 스스로 참구하는 방식이었다. 제자들에게는 조주의 무자화두에 전념하라고 가르쳤으며, 참선을 자유와 자비를 구하는 가장 중요한 수행법으로 보았다. 수행자를 지도할 때는 침묵과 방망이질, 할, 격식을 벗어난 대화와 동그라미 등을 활용했다.

만공은 마음, 자성, 불성, 여여불, 허공, 주인공, 본래면목, 자심, 동그라미 같은 여러 이름으로 존재의 본체를 가리켰다. 그가 보기에 한 사람의 참된 본질은 우주 만물의 본체와 다르지 않았고, 불교의 핵심은 인간이 자기 마음을 깨닫는 데 있었다. 차별하고 분별하는 관념을 수행으로 떨쳐 낸 사람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지혜와 자비를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며, 바로 그런 사람이 부처이자 스승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만공은 수행자의 노력과 함께 선지식, 수행에 알맞은 도량, 함께 공부할 좋은 도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며 그중에서도 좋은 스승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속세에서도 배경과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의 명성을 듣고 궁궐의 상궁과 나인들이 법문을 들으러 찾아온 적도 있었다. 만공은 이들에게 “앞산에 딱따구린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그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네.”라는 노래를 들려주었고, 뜻을 묻는 상좌들에게 그 노래 자체가 법문이라고 답했다.

덕숭산의 중창과 선불교 진흥

만공은 덕숭산의 수덕사·정혜사·견성암과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 등을 중창했다. 간월암 중창은 1914년에 이루어졌다.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 설립운동에 나섰고, 선승들이 결사해 경제적 자립을 꾀한 계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에도 함께했다.

1927년에는 《현양매구》를 지어 자신을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밝히며 임제종풍의 계승자임을 선언했다. 193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이 설립될 때 이사로 참여했으며, 이어 이사장에 선임되고 방한암은 부이사장을 맡았다.

보월·전강·용음·고봉·혜천·금봉·혜암·춘성·금오·벽초·서경·원담을 비롯한 승려들이 만공의 문하에서 배출됐고, 비구니 법희·만성·일엽도 가르침을 받았다. 실연 뒤 찾아온 일엽은 출가 의지가 굳어 문하에 받아들였지만, 나혜석의 출가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의 제자였던 춘성도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입적한 뒤 만공을 찾아와 수행했다.

만공이 처음 전법게를 준 제자는 수제자 보월이었으나 보월은 40세로 요절했다. 보월이 1924년 12월 입적한 뒤 만공은 1925년 2월 정혜사에서 금오에게 건당식을 베풀고 전법게를 주었다. 1929년에는 현문이 어묵동정 화두로 대각견성하자 새로 인가하고 혜암이라는 법호와 전법게를 내려 법통을 잇게 했다. 법맥은 경허 75대, 만공 76대, 혜암 77대, 묘봉 78대로 이어졌다.

일본 불교화에 맞선 행동

만공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조선불교의 일본불교화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1937년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열린 조선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총독부의 주장을 호통치며 공박했다. 그는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말로는 독실한 불자라 하나 조선의 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교리에 따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를 우리가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고 말하며 그의 명복을 빌어주자고 조롱했다.

조선총독부가 1940년 5월 창씨개명을 시행하자 만공은 이를 거부하고 오로지 수행과 참선에 몰두했다. 이듬해인 1941년 선학원 전국고승법회에서는 계율을 올바로 지키는 일과 선의 진작을 통해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잇자고 강조했다.

전월사의 마지막과 이어진 법맥

만공은 1940년대 덕숭산 상봉에 세운 전월사에서 생활하며 선불교 진흥에 힘썼고 그곳에서 1945년 광복을 맞았다.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라고 중얼거린 뒤 잠들듯 입적했다. 당시 세수는 75세이고 법랍은 62세였다.

다비는 덕숭산에서 치러졌고 유골을 모신 만공탑이 금선대 근처에 세워졌다. 진영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됐다. 사후에는 《만공어록》이 편찬됐으며 저술로 《만공법어》와 《현양매구》도 전한다. 그의 삶은 1990년 불교방송 라디오 드라마 《고승열전》에서 신구가 연기했고,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정대용이 맡았다.

만공은 경허의 법을 계승해 간화선 수행을 널리 전하고 덕숭산을 중심으로 후학을 길렀으며, 총독부의 불교정책과 창씨개명에 맞서 조선불교를 지키려 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다. 그의 활동으로 선불교가 크게 중흥했고, 현대 한국불교계에는 큰 법맥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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