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로는 고려 전기에 문하시랑평장사와 문하수시중 등을 지낸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982년 성종이 수도의 5품 이상 관리들에게 봉사를 올리게 하자 28조의 시무책을 올려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른 국정 운영 방향을 제시했고, 성종 대의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신라에서 고려로 건너온 학자
최승로는 927년 경주에서 태어난 고려 초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이며, 문장가와 시인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본관은 경주이고, 아버지 최은함은 신라의 6두품 출신 관료였다.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자 최승로도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송도에 자리 잡았다.
『고려사』는 최은함이 오랫동안 자식을 얻지 못하다가 기도한 뒤 최승로를 낳았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연결되는 탄생 설화가 실려 있다. 최승로가 태어난 지 3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공격하자, 최은함은 피란을 앞두고 아들을 중생사의 관음보살상 사자좌 아래에 숨겼다. 그는 “이웃 나라의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 사세가 급박한데 어린 자식이 누가 되어 둘 다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대성(大聖)이 보내신 아이라면 크나큰 자비의 힘으로 보호하여 길러주셔서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6개월 뒤 돌아온 최은함은 아이의 몸이 새로 씻은 듯 깨끗하고 입에는 젖 냄새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삼국유사』는 부자의 이름을 각각 최승로(崔丞魯)와 최은함(崔殷諴)으로 적어 『고려사』의 표기와 차이를 보인다.
태조 앞에서 『논어』를 읽은 소년
어린 최승로는 학문과 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938년 12세의 나이로 태조 앞에 나아가 『논어』를 읽었고, 태조는 그에게 소금 단지와 안장을 갖춘 말, 예식 20석을 내렸다. 또한 원봉성의 학생으로 선발해 학문을 이어가게 했다. 최승로는 이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문장과 학문을 담당하는 관직에 종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 6두품 지식인 가운데 중국 당나라에서 공부한 사람이 많았지만, 최승로는 국내에서 학문을 닦은 것으로 여겨진다. 광종 재위기에 그가 문병을 맡았다는 기록은 있으나 실제 정치에 얼마나 깊이 참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주 출신 쌍기가 등장한 뒤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경종 때까지도 두드러진 행적은 많지 않으며, 그의 정치적 역량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성종 대였다.
고려의 국정 방향을 설계한 시무 28조
982년 성종은 수도의 관직에 있던 5품 이상 관리들에게 정치와 행정의 장단점을 논하는 봉사를 제출하게 했다. 당시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으로 행정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던 최승로는 같은 해 6월 28개 조항으로 구성한 시무책을 올렸다. 현재까지 전하는 조항은 22개다.
이 상서문에는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왕의 통치에 대한 평가가 담겼다. 최승로는 북계의 확정과 방위 대책을 비롯해 사회문제와 중국을 대하는 관점도 제시했다. 공덕재를 없애고 승려의 궁중 출입을 막으며, 국왕이 불법을 지나치게 숭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건의도 포함했다. 불교 세력의 폐단과 그로 인해 국가 재정이 입는 손실을 지적하면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른 국정 운영을 제안한 것이다.
최승로가 구상한 정치는 군주가 국정의 중심에서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되 신하들과 긴밀히 협의하고, 어느 한쪽의 독주를 서로 견제하는 형태였다. 성종은 그의 의견에 크게 공감했으며, 28조는 대부분 받아들여져 새로운 정치제도와 지방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 반영됐다. 최승로의 상서문은 고려 초기의 정치 상황과 정치사상을 함께 담아 후대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됐다.
유교 의례의 추진과 현실의 반발
최승로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불교를 개인의 몸과 마음을 닦는 도리로 보고,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로 구분했다. 이들은 국가 의례로 치러져 경제적 부담이 컸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지하고, 그 자리를 환구 제사와 사직 제사 같은 유교 의례로 대신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관리들의 반발을 불렀고 백성의 호응도 얻지 못했다. 성종이 사망한 뒤 거란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현종이 즉위한 뒤 두 행사는 부활했으며,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을 떠나 청주로 피란한 현종이 청주행궁에서 연등회를 연 뒤에는 법적으로 정례화됐다. 이후 고려의 국가 의례는 불교와 유교의 두 체계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의 정치 보좌관과 문정이라는 이름
시무책을 제출한 뒤 최승로는 어린 성종을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983년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라 지제고를 겸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이몽유·유언유·노혁과 함께 진사를 선발했다. 성종의 복시를 거쳐 갑과의 강은천, 을과 2명, 명경 1명이 급제했다.
988년 최승로는 문하수시중으로 승진하고 청하후에 봉해졌으며 식읍 700호를 받았다. 그는 여러 차례 글을 올려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청했지만 성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최승로는 989년 음력 5월 12일인 양력 6월 17일에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베 1,000필, 면(麪) 300석, 멥쌀 500석, 유향 100냥, 뇌원차 200각, 대차 10근을 부의로 내렸으며 태사에 추증했다. 998년에는 최량과 함께 성종의 묘정에 배향됐고, 1033년에는 대광과 내사령이 더해졌다. 시호는 문정이다.
최승로가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까닭은 시무 28조를 통해 고려 초기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고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른 국가 운영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건의는 성종 대 국가체제 정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군주와 신하가 협력하고 서로의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정치 구상도 함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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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최승로」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최승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