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및 전자 제조업계에서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생산 공정 혁신이 본격화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산업용 AI 스타트업 가우스랩스가 개발한 가상 계측 솔루션 판옵테스 VM(Panoptes VM)을 반도체 양산 공정에 도입해 공정 안정성과 수율을 끌어올렸고, 삼성전자는 반도체 패키징 공장의 무인화 비율을 높이며 2030년 완전 무인 공장 전환을 목표로 제시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 제조업이 노동집약적 생산 방식에서 데이터 기반의 지능형 생산 체계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SK하이닉스, AI 가상 계측으로 공정 안정성 확보
SK하이닉스는 2022년 11월 산업용 인공지능 전문 스타트업 가우스랩스에 투자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부터 가우스랩스가 개발한 가상 계측 소프트웨어 판옵테스 VM을 반도체 양산 팹에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판옵테스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눈이 백 개 달린 거인에서 따온 것으로, 센서 데이터를 활용해 웨이퍼 제조 공정 결과를 실시간으로 예측하는 것이 핵심 기능이다.
이 솔루션은 반도체 품질과 직결되는 박막 증착 공정에 우선 적용됐다. SK하이닉스 뉴스룸에 따르면 판옵테스 VM으로 예측한 가상 계측값을 첨단공정제어(APC) 시스템과 연동한 결과 공정 산포가 평균 21.5퍼센트 개선되고 수율도 향상되는 성과를 냈다. 가우스랩스는 2024년 8월 후속 버전인 판옵테스 VM 2.0을 출시했으며, SK하이닉스는 적용 범위를 박막 증착 공정에서 식각 공정으로 확대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패키징 라인 무인화 확대
삼성전자는 충남 천안과 아산 온양의 반도체 패키징 공장에 세계 최초로 무인화 라인을 구축해 가동하고 있다. 김희열 삼성전자 테스트앤시스템패키지(TSP) 총괄 팀장은 2023년 무인화 라인 구축 사실을 공개하며, 사람이 상주하지 않아도 장비가 스스로 공정을 처리하는 체계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반도체 패키징 공정은 전통적으로 인력 투입이 많은 작업으로 꼽혀왔다는 점에서 이번 무인화는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삼성전자는 이후 자동화 솔루션 적용 범위를 넓혀 2024년 기준 패키징 공정의 무인화율을 약 30퍼센트 수준까지 끌어올렸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2030년까지 반도체 생산라인의 무인화율을 100퍼센트로 높이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으며, 이는 생산성 극대화와 함께 반도체 업계의 고질적인 인력난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스마트 제조가 산업 경쟁력의 핵심 변수로
업계에서는 AI 기반의 예측 유지보수와 무인화 기술이 반도체를 비롯한 한국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계 고장을 사전에 예측해 생산 중단을 최소화하고, 공정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불량률을 낮추는 기술은 인건비 절감뿐 아니라 품질 안정성 확보에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 특성상 미세한 공정 오차도 수율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기업들은 AI 도입을 통해 공정 변동성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14년부터 스마트공장 보급확산 사업을 운영하며 중소·중견 제조기업의 스마트 공장 구축을 지원해왔다. 대기업이 자체 기술력으로 AI 자율화를 추진하는 것과 별도로, 정부 지원 사업은 상대적으로 자본과 기술력이 부족한 중소 제조업체들이 데이터 기반 생산 관리 체계를 도입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왔다.
전문가들은 한국 제조업체들이 AI와 로봇,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결합한 스마트 팩토리 구축 경쟁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초기 투자 비용과 기존 인력의 재교육, 데이터 보안 등은 확산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술 격차를 좁히는 것도 스마트 제조 정책의 남은 과제로 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