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윤관, 별무반 창설과 동북 9성 건설…한국사 인물

[고려] 윤관, 별무반 창설과 동북 9성 건설…한국사 인물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고려 전기의 문신 윤관은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해 관료 생활을 시작했고, 1107년 별무반을 포함한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 정벌에 나서 동북 9성을 쌓았다. 그러나 1109년 조정이 9성을 여진에 돌려주기로 하면서 관직과 공신호를 빼앗겼다가 예종의 비호로 다시 관직을 받았다.

문과 급제자에서 북방 지휘관으로

윤관은 고려 전기의 문신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동현이다.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윤신달의 현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윤집형의 아들이다. 출생일은 알려지지 않았고 1111년 예종 재위기에 세상을 떠났다. 흔히 장군으로 기억되지만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해 관료 생활을 시작한 문신이었다.

윤관은 습유와 보궐을 거쳐 1087년 합문지후가 되었고, 출추사로 광주·충주·청주를 시찰했다. 1095년에는 좌사낭중으로서 요나라에 가 숙종의 즉위를 알렸으며, 1098년에는 동궁시학사로 송나라에 파견돼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 추밀원지주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 등을 지냈다. 1102년에는 이굉과 진사시를 주관했다.

숙종 시기 고려의 동북 변경에서는 완안부를 중심으로 성장한 여진 세력이 위협을 확대하고 있었다. 우야소가 완안부를 이끈 1103년 무렵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이르렀고, 이듬해에는 완안부 기병이 정주관 밖까지 진출했다. 고려는 여진 정벌을 시도했지만 임간이 이끈 군대가 크게 패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패전에서 태어난 별무반

윤관은 1104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으로 여진과 싸웠으나 강한 기병을 앞세운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그는 임기응변으로 화친한 뒤 철수했고, 고려의 보병만으로는 여진 기병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윤관은 전투력을 높이고 기병을 훈련해야 한다고 왕에게 건의했으며, 그해 12월부터 정벌 준비에 힘을 쏟았다. 이 패전의 경험을 토대로 여진 기병에 맞설 특수부대 별무반이 조직됐다.

윤관은 숙종 때 여진 정벌 임무만 맡았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대각국사 의천과 함께 숙종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남경 건설과 금속화폐 유통책, 신법 시행에도 참여했다. 과거 시험과 추천을 통해 새로운 관료를 선발하는 정책에도 관여했다.

17만 대군과 동북 9성

1107년 변방에서 여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윤관은 토벌을 요청했다. 예종은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했다. 윤관은 별무반을 포함한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로 향했다. 고려군은 중군·좌군·우군으로 편성됐으며 수군도 작전에 투입됐다.

윤관은 고려가 붙잡아 두었던 허정과 나불 등을 돌려보내겠다는 거짓 통보로 여진 병력 400여 명을 유인해 거의 섬멸하고 사로잡았다. 이어 5만 3,000명을 이끌고 정주에 도착해 김한충에게 중군, 문관에게 좌군, 김덕진에게 우군을 맡겼다. 양유송 등이 지휘한 수군 2,600명은 도린포 방면에서 공격했다. 동음성으로 물러난 여진군은 정예부대가 추격해 격파했고, 석성의 병력은 척준경이 공격했다.

이 원정에서 고려군이 무너뜨린 여진의 전략 거점은 135개 처였고, 전사자는 4,940명, 생포자는 1,030명으로 기록됐다. 윤관은 승전 내용을 조정에 보고한 뒤 장수들을 배치해 확보한 지역을 획정하고 성을 쌓았다.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공험진에 먼저 6성을 마련했으며, 1108년 숭녕·통태·진양 3성을 추가해 동북 9성을 완성했다. 함흥평야의 함주에는 대도독부를 설치해 핵심 요충지로 삼았다.

성곽 건설은 주민 이주와 함께 진행됐다. 함주에는 1,948가구, 영주에는 1,238가구, 웅주에는 1,436가구, 복주와 길주에는 각각 680가구, 공험진에는 532가구가 옮겨갔다. 윤관은 남도지방 사람들을 새 영토에 정착시켜 개척하게 하고 별도의 병력을 두어 방어하도록 했다.

완안부의 우야소는 9성 설치에 반발해 1108년 다시 공격했다. 가한촌 전투에서 윤관과 고려군은 포위됐으나 척준경 등의 활약으로 구출됐다. 영주성과 웅주성을 둘러싼 전투에서도 척준경이 여진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윤관은 1108년 3월 30일 포로 346명과 말 96필, 소 300두를 거두어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에 책록되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에 임명됐다.

9성 반환과 정치적 추락

동북 9성의 확보가 곧 안정적인 지배를 뜻하지는 않았다. 삶의 터전과 농경지를 잃은 여진 세력은 무력 저항을 계속하면서, 성을 돌려주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했다. 고려 조정에서도 넓은 지역과 멀리 떨어진 성들을 지키기 어렵고, 계속된 군사 동원이 백성의 원망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1109년 7월 3일 열린 회의에서 최홍사 등 28명은 반환에 찬성했고 한상은 반대했다. 윤관과 오연총도 9성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조정의 대세는 화평으로 기울었다. 고려는 7월 18일부터 철수를 시작해 목숨을 걸고 개척한 9성 일대를 여진에 돌려줬다.

같은 해 윤관은 오연총과 다시 출정했지만 공험진에서 기습을 당해 여진군 공략에 실패하고 화친한 뒤 돌아왔다. 그는 계속된 침입을 막지 못하고 국력을 소모했다는 탄핵을 받아 관직과 공신호를 빼앗겼다. 왕에게 복명하지도 못한 채 사제로 돌아가야 했지만, 예종의 비호로 다시 관직을 받았다. 1110년에는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임명됐으나 사의를 밝혔다.

북방 방어에 남은 이름

윤관은 1111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처음 받은 시호는 문경이었으나 1130년 예종의 묘정에 배향될 때 휘를 피해 문숙으로 고쳐졌다.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윤관은 여진족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아 북방의 방어력을 높인 점을 높이 평가받는다. 한편 만년에 공신호를 삭탈당하고 불우한 최후를 맞은 데 대해서는 동정 여론도 있다.

같은 분야 최신 기사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