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상은 고려 중기 인종 때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서경 출신이다. 「송인」 등 한시를 남겼으며, 1135년 음력 1월 10일 묘청의 난의 주요 관련자라는 이름으로 처형됐다.
서경에서 자란 문인
정지상은 고려 중기 예종과 인종 대에 활동한 문신이자 시인이다. 초명은 정지원이고 호는 남호이며, 서경 출신이다. 출생 연도는 전하지 않으며 1135년 음력 1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노씨 아래에서 자랐으며, 기억력과 글씨 솜씨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의 시재를 보여주는 일화도 남아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지상은 5세 때 강물 위의 해오라기를 보고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乙자를 강물에 썼는고(何人將白筆 乙字寫江波).”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성장한 뒤에는 문학뿐 아니라 역학과 불교 경전에 조예를 보였고, 노장사상에도 심취했다. 그림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사륙변려체를 잘 썼다고 전한다.
왕 앞에서 경전을 논한 관료
정지상은 서경에 설치된 분사국자감시의 진사시에 합격한 뒤, 1112년 오연총이 주관한 진사시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1114년에는 문과에 급제해 관료로 활동했다. 1127년 좌정언으로 재직할 때에는 이자겸 세력을 제거한 공을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던 척준경을 탄핵했고, 척준경은 유배됐다.
같은 해 인종이 기린각에 나아갔을 때 정지상은 왕명에 따라 『서경』의 「무일」편을 강의했다. 1129년에는 좌사간으로서 윤언이 등과 함께 당시 정치의 잘잘못을 논한 상소를 올렸고, 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1130년 지제고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아 시인 곽여의 죽음을 기리는 「산재기」를 지었다.
1132년 기거주로 재직할 때에는 윤언이가 설명한 『역경』 건괘의 어려운 대목을 묻고 토론했다. 같은 해 정항·윤언이와 함께 경연에서 경서를 강의하고 인종에게 화서대를 받았다. 1133년에는 김부식이 숭문전에서 강론한 『주역』과 『상서』를 놓고 김부의·홍이서·정항·윤언이 등과 함께 난해한 부분을 질문했다.
서경 천도와 비극적 최후
음양비술에도 관심이 컸던 정지상은 묘청·백수한과 함께 삼성으로 불렸다. 그는 고려의 별도이자 자신의 고향인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주장에 동조했으며, 칭제건원과 금나라 정벌도 지지했다. 이 노선은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세력과 대립했다.
1135년 묘청 등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정지상은 주요 관련자로 지목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서경 세력에 적극 가담해 금나라 정벌과 칭제건원을 주장했으며,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군에 패해 개경에서 참살됐다고 서술한다.
『고려사절요』에는 김부식이 서경으로 출정하기 전 정지상·백수한·김안을 역적과 내응한 인물로 몰아 불러들인 뒤 죽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 기록은 말미에, 당시 사람들이 김부식과 정지상이 문인으로서 명성이 같아 불평이 쌓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내응했다며 죽였다고 말했다는 대목도 담고 있다.
전설이 된 문학적 경쟁
『백운소설』에는 두 사람의 문학적 갈등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려 있다. 정지상이 절에서 지은 “절에 독경소리 그치니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구나”라는 구절을 김부식이 자기 작품으로 삼으려 했지만 정지상이 거절했고, 그 원한이 훗날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이는 홍만종이 정리한 문학 일화다.
같은 책에는 죽은 정지상이 귀신으로 나타났다는 야사도 전한다. 김부식이 “버들은 천 가닥으로 푸르고 복사꽃은 만 점(點)으로 붉다”라고 짓자 정지상이 따귀를 때리며 “버드나무가 천 갈래인지 복사꽃이 만 점인지 그걸 네가 일일이 세어봤느냐? 어떻게 ‘버들은 가닥마다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라고 지을 줄 모르느냐?”라고 꾸짖었다는 내용이다. 이어 정지상의 귀신이 뒷간에 있던 김부식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지만, 『고려사』에는 김부식의 죽음과 관련한 이러한 기록이 없다.
「송인」과 서경의 시세계
정지상의 대표작 「송인」은 이별하는 연인의 목소리를 빌려 벗을 보내는 슬픔과 불안을 드러낸 한시다. “해마다 이별 눈물 강물을 더하는 것을”, “나의 이별 시름 풀어주려나”라는 표현에는 떠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직접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서 서경은 과거의 역사와 당대의 번화함이 함께 놓인 공간이며, 이러한 서경인으로서의 의식은 시세계의 중요한 특징으로 평가된다.
「서도」에서는 “번화한 거리”와 “푸른 창 붉은 문”으로 서경의 부유하고 화려한 풍경을 그렸다. 한편 “이원제자의 집”과 흐느끼는 노랫소리는 서경이 개경 귀족과 금나라 사신, 서경 유력층의 향락 공간에 머무는 한계도 나타낸다. 「취후」에는 술에 취해 선경을 거닐다가 “꽃동산에 누어 강남을 꿈꾸”는 모습이 등장하며, 그의 노장적 관심과 낙관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장원정」에서는 “신선 고장”과 “봉래산”을 그렸고, 「제개성사팔척방」에서는 속세를 벗어난 “그윽한 사람”을 갈망했다. 「제변산소래사」의 “한평생 인간 시끄러운 꿈조차 안꾸는” 긴 눈썹의 늙은 승려도 그가 지향한 탈속적 인간상으로 제시된다. 그의 시에서는 가난과 이별의 슬픔, 출세 뒤의 자신감, 서경 천도의 염원, 자연 속에서 평온하게 살고 싶은 소망이 함께 나타난다.
작품으로 남은 고려의 대표 시인
정지상의 문집 『정사간집』은 기록에만 남고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전하는 작품은 한시 20편과 연구 4편 등이며, 고려 시대부터 『파한집』·『보한집』·『동국이상국집』·『역옹패설』·『삼한시귀감』에 수록됐다. 조선 시대의 『동문선』을 비롯한 한시 문헌들도 정치적으로 붙은 역적이라는 이름과 별개로 그를 고려의 대표 시인으로 평가했으며, 그는 고려 12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작품으로는 「신설」·「향연치어」·「백률사」·「서루」가 전한다. 정지상은 관료로서 척준경을 탄핵하고 국정의 잘잘못을 논했으며, 경연에서는 여러 경전을 토론했다. 정치적으로는 서경 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에 연결돼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오늘날에도 「송인」을 비롯한 뛰어난 한시와 서경을 중심에 둔 독특한 시세계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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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정지상」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정지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