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송해, ‘전국노래자랑’ 대표 진행자이자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진행자…한국사 인물

[현대] 송해, '전국노래자랑' 대표 진행자이자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진행자…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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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면에서 태어난 송해의 본명은 송복희이고, 본관은 은진 송씨다. 성악을 배우려 1949년 해주예술전문학교에 발을 들였고, 무대에 오르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수이자 희극 배우, 방송인으로 무대와 브라운관을 오가다 2022년 6월 8일 눈을 감았다.

실향과 통신병 복무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터진 뒤 인민군 징집을 피하려 동네 산자락에 몸을 숨겼다가 돌아오는 일을 몇 차례 되풀이했다. 세 번째 피신 때는 사정이 나빠져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이듬해 1.4 후퇴 당시 미군 탈출선에 올라 남쪽으로 향했다.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모친이 남긴 “얘야, 이번에는 조심하렴”이라는 말은 모자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가 됐다. 그 기억은 2015년 발표한 〈유랑청춘〉의 가사로 남았다. ‘송해’라는 예명 역시 남하하던 배 위에서 직접 붙인 것으로, 눈앞의 바다처럼 넓은 세상을 품겠다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배가 닿은 곳은 부산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에 들어간 그는 휴전이 될 때까지 통신병으로 지냈다. 1953년 7월 27일 맺어진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 그 통신문을 모스 부호로 띄워 보내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부대가 대구 달성공원에 머물던 시절 선임 상사의 여동생인 석옥이 여사와 인연이 닿았고, 두 사람은 한 해 뒤 부부가 됐다.

가수 데뷔와 방송 진행

군복을 벗은 1955년 창공악극단 소속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1963년에는 영화 《YMS 504의 수병》에 단역으로 이름을 올리며 스크린에도 발을 들였다. 코미디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활동의 무게추는 방송 진행 쪽으로 옮겨갔고, 인기도 뒤따랐다. 1970~1980년대에는 구봉서·배삼룡·이주일·남성남과 함께 코미디 프로그램과 진행석을 채웠다. 1970년대 주무대였던 TBC가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로 문을 닫은 뒤에는 KBS 2TV에서 활동했다.

아침 교통정보를 다룬 《가로수를 누비며》는 동양방송에서 1975년에 시작해 1980년 11월 30일까지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이 KBS 라디오서울로 넘어간 1980년 12월 1일 이후로도 마이크를 놓지 않아 1989년까지 진행을 이어갔다. 노래도 손에서 놓지 않아 《가요무대》 등에서 전통 가요를 불렀고, 80세를 넘긴 뒤에도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2018년에는 정규 앨범 《딴따라》를 내놨으며, 〈홍도야 우지 마라〉를 다시 부른 음원과 함께 〈나팔꽃 인생〉, 〈유랑청춘〉, 〈내 인생 딩동댕〉, 〈내 고향 갈 때까지〉 같은 오리지널 곡도 선보였다.

《전국노래자랑》과 평양 무대

1987년 3월 스물세 살 외아들을 뺑소니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그는 상실감과 자책 속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당시 《전국노래자랑》 연출을 맡고 있던 안인기 PD는 “더는 슬픔에 잠겨 있지 말고 툭툭 털고 일어나 저와 야전부대나 하면서 전국을 돌며 바람이나 쐽니다.”라며 손을 내밀었다. 고심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1988년 5월 8일 진행을 맡았다. 1994년 KBS 봄 개편으로 6개월가량 자리를 비웠고 그사이 진행은 김선동 아나운서 몫이었으나, 시청자 항의와 시청률 하락이 겹치면서 그해 10월 다시 진행석으로 돌아왔다.

공개방송은 로스앤젤레스와 도쿄도, 베이징, 뉴욕, 런던 등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열렸다. 대한민국에서 항공편으로 약 27시간 걸리는 파라과이 공개방송은 특히 화제를 모았다. 2003년에는 《평양노래자랑》 특집에 나섰는데, 월남 이후 51년 만에 밟은 북녘 땅이었다. 월남 경력을 문제 삼은 북한 측 탓에 체류 허가를 받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진행은 조선중앙TV 아나운서 전성희와 둘이 나눠 맡았다. 마지막 순서에서 〈다시 만납시다〉가 합창으로 울려 퍼지자 그는 눈물을 보였다.

방송 뒤 열린 만찬에서 고향 황해도 재령군 이야기를 꺼내자 동석한 북한 관계자는 “시간이 오래 흘러 그곳에는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이 말에 모친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회고했다.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어보고 싶다는 뜻은 여러 차례 밝혔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2018년 1월 부인 석옥이와 사별했고, 90세가 넘어서도 2010년대까지 야외 녹화를 이어가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야외 녹화가 멈추자 스튜디오 특집으로 프로그램을 끌고 갔다.

기네스 기록과 영결식

2022년 5월 23일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랐다.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같은 달 제작진에게 더는 진행이 어렵다는 뜻과 함께 하차 의사를 전했다. 마지막 TV 출연일은 2022년 5월 15일이었고, 24일 뒤인 6월 8일 아침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자택에서 숨졌다. 사인은 자택 욕실에서 일어난 급성 심근경색으로 알려졌다.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무대에서 시작해서 무대에서 죽을 사람이다. 다른 길로 가면 백 번 지게 되어있다. 죽는 날까지 TV에 나오고,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영결식은 6월 1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고, 엄영수 방송코미디언협회장이 식을 이끌었다. 엄영수는 “선생님은 ‘전국 노래자랑’에서 출연자와 그냥 대화만 하신 게 아닙니다. 선생님이 거친 그곳들은 재래시장이 되고, 무·배추밭이 되고, 화개장터가 됐습니다. 모두가 춤추고, 노래하고, 흥겹게 노는 자리를 깔아주신 우리 선생님은 할아버지·할머니를 청춘으로, 출연자를 스타로 만드는 마술사였습니다.”라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후배 코미디언 이용식은 “이 곳에서 전국노래자랑을 많은 사람과 힘차게 외쳤지만, 이제는 수많은 별 앞에서 ‘천국 노래자랑’을 외쳐달라”며 “선생님이 다니시던 국밥집, 언제나 앉으시던 의자가 이제 우리 모두의 의자가 됐다. 안녕히 가시라”고 작별인사를 전했다. 영구는 후배 희극 배우 최양락과 양상국, 조문식, 유재석, 강호동 등이 운구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고를 듣고 매우 안타까움을 표시하며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조문차 보냈고, 문화예술인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노제는 같은 날 오후 종로구 낙원동 송해길을 거쳐 한국방송공사 본관 앞에서 거행됐다. 김의철 KBS 사장은 “송해 선생님, 들리십니까. 대한민국 전국 공원에서, 널따란 운동장에서 ‘전국노래자랑’의 딩동댕 소리가 울렸습니다”라며 “선생님의 작은 거인 같은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고, 국민들과 웃던 그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부디 세상의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편히 영면하소서”라고 추모했다. 유해는 쉐보레 트래버스 장의차에 실려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화장을 거친 뒤 기세리 장지에 닿았다. 6.25 전쟁에 통신병으로 참전해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였으나, 유언에 따라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에 있는 석옥이 여사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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