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송해, ‘전국노래자랑’ 대표 진행자이자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진행자…한국사 인물

[현대] 송해, '전국노래자랑' 대표 진행자이자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진행자…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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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의 생애에는 노래와 희극, 전쟁과 이산의 경험이 함께 놓여 있다.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면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송복희이며, 은진 송씨다. 《전국노래자랑》 진행자로 널리 알려졌지만, 무대를 향한 출발점은 1949년 입학한 해주예술전문학교 성악과와 그때 시작한 공연이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인민군 징집을 피하려 산으로 몸을 숨기던 그는 세 번째 피신 뒤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남쪽으로 향하는 미군 탈출선에 올랐다. 어머니가 남긴 “얘야, 이번에는 조심하렴”이라는 당부는 모자가 나눈 마지막 말이 됐다. 배에서 바라본 바다는 넓은 세상을 품겠다는 마음과 함께 예명 ‘송해’의 바탕이 됐다.

부산에 도착한 뒤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통신병이 됐다. 1953년 7월 27일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됐을 때 그가 맡은 일은 협정 통신문을 모스 부호로 보내는 것이었다. 대구 달성공원에서 복무하던 시절에는 선임 상사의 여동생 석옥이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가수로 시작해 희극과 방송 진행으로 무대를 넓혔다

제대 뒤 선택한 첫 직업 무대는 창공악극단이었다. 1955년 이곳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한 송해는 1963년 《YMS 504의 수병》 단역으로 영화에도 발을 들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코미디 프로그램 출연과 방송 진행이 활동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1970~1980년대에는 구봉서·배삼룡·이주일·남성남 등과 코미디와 진행 무대에서 활동했다. 1970년대까지 몸담았던 TBC가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강제 폐국되자 활동 무대도 KBS 2TV로 옮겨졌다. 방송 제도의 변화 속에서도 그의 진행은 이어졌다. 1975년 시작한 아침 교통정보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는 TBC에서 KBS 라디오서울로 계승돼 1989년까지 송해와 함께했다.

방송 진행자로 이름을 얻은 뒤에도 노래를 놓지 않았다. 《가요무대》에서 전통 가요를 불렀고, 80세가 넘어서도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2015년 발표한 〈유랑청춘〉에는 어머니와 헤어진 사연을 가사로 담았으며, 2018년에는 정규 앨범 《딴따라》를 내놓았다. 〈홍도야 우지 마라〉를 다시 부르는 한편 〈나팔꽃 인생〉, 〈내 인생 딩동댕〉, 〈내 고향 갈 때까지〉 같은 자신의 곡도 발표했다.

아들을 잃은 뒤 맡은 전국노래자랑이 대표 무대가 됐다

《전국노래자랑》과의 인연 앞에는 가족을 잃은 고통이 있었다. 1987년 3월 스물세 살 외아들이 뺑소니 교통사고로 숨지자 송해는 상실감과 자책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당시 프로그램 연출자 안인기 PD는 “더는 슬픔에 잠겨 있지 말고 툭툭 털고 일어나 저와 야전부대나 하면서 전국을 돌며 바람이나 쐽니다.”라는 말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송해가 처음 진행을 맡은 날은 1988년 5월 8일이다. 그 자리가 줄곧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1994년 봄 개편 때 김선동 아나운서로 교체됐으나 시청자 항의와 시청률 하락 등이 뒤따랐고, 약 6개월 뒤인 그해 10월 송해가 돌아왔다.

프로그램의 공개방송은 국내를 넘어 로스앤젤레스·도쿄도·베이징·뉴욕·런던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에서 항공편으로 약 27시간 걸리는 파라과이에서도 무대를 열었다. 송해는 90세가 넘어서도 2010년대까지 야외 녹화에 참여했으며,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현장 녹화가 멈춘 뒤에는 스튜디오 특집으로 방송을 이어갔다.

평양 무대에 섰지만 고향 공연의 뜻은 이루지 못했다

해외 공개방송과는 다른 사연을 지닌 무대가 2003년의 《평양노래자랑》이었다. 월남 이력을 문제 삼은 북한 측과 체류 허가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송해는 평양에서 조선중앙TV 아나운서 전성희와 함께 진행했다. 마지막 순서에 〈다시 만납시다〉 합창이 나오자 그는 눈물을 흘렸다.

공연 뒤 만찬에서 꺼낸 이야기는 고향 황해도 재령군이었다. 함께 있던 북한 관계자는 “시간이 오래 흘러 그곳에는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송해는 그 말을 듣고 어머니와 재회할 수 없음을 실감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드러냈으나 그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다.

남쪽에서 가족의 인연이 이어진 곳은 아내의 고향 달성이었다. 2010년 달성군의 《전국노래자랑》 때 그는 김문오 군수에게 아내를 생각하며 이곳을 종종 찾는다고 이야기했다. 달성군은 2011년 명예군민, 2012년 홍보대사로 그를 위촉했다. 송해는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 매년 비슬산 참꽃축제에서 사회를 맡았으며, 2018년 1월 아내와 사별했다.

최고령 진행자 기록 뒤 마지막 작별이 이어졌다

2022년 5월 23일 기네스 세계 기록은 만 95세 송해를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 등재했다. 그러나 같은 달 그는 건강 악화로 더는 진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제작진에게 전했다. 마지막 TV 출연은 5월 15일이었고, 6월 8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송해는 생전 인터뷰에서 “나는 무대에서 시작해서 무대에서 죽을 사람이다. 다른 길로 가면 백 번 지게 되어있다. 죽는 날까지 TV에 나오고,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겠다.”라고 말했다. 영결식을 진행한 엄영수 방송코미디언협회장은 “선생님은 ‘전국 노래자랑’에서 출연자와 그냥 대화만 하신 게 아닙니다. 선생님이 거친 그곳들은 재래시장이 되고, 무·배추밭이 되고, 화개장터가 됐습니다. 모두가 춤추고, 노래하고, 흥겹게 노는 자리를 깔아주신 우리 선생님은 할아버지·할머니를 청춘으로, 출연자를 스타로 만드는 마술사였습니다.”라며 추모했다.

후배 이용식은 “이 곳에서 전국노래자랑을 많은 사람과 힘차게 외쳤지만, 이제는 수많은 별 앞에서 ‘천국 노래자랑’을 외쳐달라”며 “선생님이 다니시던 국밥집, 언제나 앉으시던 의자가 이제 우리 모두의 의자가 됐다. 안녕히 가시라”고 작별했다. 최양락·양상국·조문식·유재석·강호동 등이 운구에 참여했다.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였던 송해는 유언에 따라 대구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의 아내 곁에 묻혔다.

훈장과 동료들의 말에 방송인의 공로가 남았다

송해가 받은 문화훈장은 2001년 화관문화훈장, 2003년 보관문화훈장, 2014년 은관문화훈장으로 이어졌다. 사망 당일인 2022년 6월 8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문화예술인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2008년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2016년 한국PD대상 TV 진행자 부문 출연자상, 2020년 한국방송대상 공로상도 그의 활동을 기렸다. 사후인 2023년에는 ‘KBS를 빛낸 50인’에 이름을 올렸고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공로상도 받았다.

종로구 낙원동 송해길을 거쳐 KBS 본관 앞에서 열린 노제에서 김의철 KBS 사장은 “송해 선생님, 들리십니까. 대한민국 전국 공원에서, 널따란 운동장에서 ‘전국노래자랑’의 딩동댕 소리가 울렸습니다”라며 “선생님의 작은 거인 같은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고, 국민들과 웃던 그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부디 세상의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편히 영면하소서”라고 추모했다.

송해가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이유는 최고령 기록뿐 아니라 그 기록을 만든 구체적인 활동에 있다. 가수와 희극 배우로 출발해 《전국노래자랑》에서 출연자들을 만났고, 국내외 공개방송과 평양 특집을 진행했으며, 고령에도 공연과 음반 활동을 계속했다. 출연자를 스타로 만들었다는 동료의 평가와 방송·문화 분야의 여러 공로상은 그가 오랫동안 지켜온 무대의 의미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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