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 태어나 1937년 3월 29일 폐결핵으로 숨을 거둔 일제강점기 조선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이며 시인이다. 고향 실레마을에서의 경험과 도시에서의 가난을 해학과 비애가 공존하는 단편으로 남겼고,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실레마을과 서울을 오간 성장기
본관은 청풍이며,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의 8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출생지는 강원도 춘천으로 전하며, 그의 선대가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고향은 춘천의 실레마을이었다. 셋째 누나 김유경은 서울 진골, 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났다고 증언했지만, 김유정 자신은 수필 「오월의 산골작이」에서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라고 썼다.
가계는 조선 왕실과도 인연이 있었다. 족보에는 조선 현종의 왕비인 명성 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우명과 그의 넷째 손자 김도택이 직계 선조로 적혀 있다. 할아버지 김익찬은 1891년 증광 진사시에 급제해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아버지 김춘식도 1894년 식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예식부주사와 궁내부의관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김유정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잇달아 잃었다. 어머니는 1915년 3월 1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1917년 5월 23일 사망했다. 형 김유근이 재산을 관리한 뒤 가세가 기울면서 가족은 서울의 관철동과 숭인동, 관훈동, 청진동 등으로 거처를 옮겼다. 형의 방탕한 모습은 훗날 단편 「형」의 모티브로 알려졌다.
김유정은 1916년부터 1919년 봄까지 글방에서 『천자문』과 『계몽편』, 『통감』을 배우고 붓글씨를 익혔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3년 경성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안회남과 가까워졌다. 야구와 축구, 스케이팅, 권투, 유도 등의 스포츠와 소설 읽기, 영화 감상, 바이올린 연주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내 하모니카 서클을 만들었으며 단성사 개관기념 행사에서는 하모니카 독주도 했다. 192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마친 뒤 193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갔지만 같은 해 6월 24일 제적됐다.
질병과 좌절 속에서 찾은 농촌
경제적 곤궁과 질병은 청년기부터 김유정을 따라다녔다. 그는 치질 수술을 받은 뒤에도 늑막염과 폐결핵을 앓았으며, 안회남에게 “가슴이 뜨끔뜨끔 아프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기생 박록주를 짝사랑해 편지와 혈서를 보내고 선물을 건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직접 찾아가 구애하고 요정 앞에서 기다리다가 협박까지 했다.
김유정은 춘천으로 내려가 형을 상대로 재산 분배 소송을 준비하는 한편, 실레마을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1931년에는 경성보성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다시 퇴학했고, 충청도의 광업소에서 현장감독으로 일하다 건강이 나빠져 실레마을로 돌아왔다. 광업소와 금광을 둘러싼 경험은 「금 따는 콩밭」과 「노다지」, 「금」의 소재로 이어졌다.
고향에 머문 1930년부터 1932년 사이에는 마을 청년들과 농우회와 부인회를 조직했다. 고향집 언덕에 움막을 세우고 조명희와 조카 김영수 등과 야학을 열어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농우회는 이후 금병의숙이라는 간이학교로 인가받았으며, 김유정은 1932년 이곳에서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춘천문화방송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그가 소작인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했다고 전했다.
짧고 치열했던 문단 활동
김유정은 1932년 6월 15일 첫 작품 「심청」을 완성했으며, 이 작품은 1936년 잡지 『중앙』에 실렸다. 1933년에는 「산골 나그네」를 『제일선』에 발표했고 「총각과 맹꽁이」와 「흙을 등지고」도 내놓았다. 「산골 나그네」는 춘천에서 돌쇠어멈에게 들은 어느 들병이 여자의 이야기를 토대로 쓴 작품이었다.
본격적인 등단은 1935년에 이루어졌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1등에 뽑혔고 「노다지」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가작으로 당선됐다. 그는 같은 해 「금 따는 콩밭」과 「떡」, 「산골」, 「만무방」, 「봄봄」 등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산골 나그네」와 「봄과 따라지」, 「동백꽃」을, 1937년에는 「땡볕」과 「따라지」를 발표했다. 작가생활은 불과 2년 남짓이었지만 30편 내외의 단편과 미완성 장편 1편, 번역소설 1편을 남겼다.
후기 구인회에 참여한 그는 김문집과 이상 등과 교류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동창 안회남이 오랜 친구였고, 생활을 도운 이석훈을 통해 이상을 알게 됐다. 현덕도 투병 중인 김유정을 찾아 위로하고 그가 경기도 광주로 떠날 때 배웅한 문우였다. 김유정이 완성하지 못한 「두포전」의 뒷부분은 사후 현덕이 마무리했다.
김유정은 약값을 마련하려고 들어오는 원고 청탁에 응했지만, 돈이 생기면 술값으로 쓰기도 했다. 잡지 『여성』에서 박봉자의 글을 읽고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31통의 구애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 박봉자는 이후 평론가 김환태와 약혼하고 결혼했다.
웃음 뒤에 놓인 가난과 슬픔
김유정의 소설은 체험에 따라 세 갈래로 구분된다. 「봄봄」과 「동백꽃」은 실레마을 사람들의 가난하고 순박한 생활을 담았고, 「노다지」와 「금 따는 콩밭」은 가난 속에서 금광의 행운을 좇는 사람들을 그렸다. 「따라지」와 「봄과 따라지」에는 도시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작가 자신의 처지가 투영됐다.
그의 작품에서는 우직하고 순진한 인물, 예상 밖의 사건 전개와 반전, 속어를 활용한 표현이 독특한 개성을 만든다. 인물의 어리석음이 웃음을 일으키지만 그 웃음은 가난하고 비참한 현실과 맞닿아 슬픔을 품는다.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와 함께 해학과 비애가 나란히 나타나는 문학이다. 대표작 「동백꽃」은 전원적 정취 속에서 사춘기 남녀가 애정과 개성에 눈뜨는 과정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김유정의 독서 범위도 넓었다. 소년 시절에는 바이런의 시집을 가지고 다녔고, 조카에게 『죄와 벌』과 「가난한 사람들」, 「귀여운 여인」, 「외투」, 『마리아와 광대』, 『홍당무』, 『아Q정전』 등을 권했다. 독서 설문에서는 『홍길동전』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인상 깊은 작품으로 꼽았다. 이광수와 이효석, 로렌스와 맨스필드의 작품을 좋아했으며 니체의 초인설, 맬서스의 『인구론』, 크로폿킨의 『상호부조론』,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언급했다.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집필 의지
폐결핵은 1936년 가을부터 겨울 사이 더욱 악화됐다. 김유정은 형수의 단칸 셋방에서 지내다가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매형 유세준의 집으로 옮겼다. 1937년 3월 18일에는 친구 안회남에게 보내는 「필승전」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라고 적었고,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고 밝혔다. 또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우.”라고 호소했다.
김유정은 1937년 3월 29일 아침 6시 30분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 홍제동 화장터로 옮겨져 화장됐다. 작품집 『동백꽃』은 1938년에 출간됐고, 『김유정전집』은 1968년에 나왔다. 춘천시는 그의 사상과 문학을 알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마련해 2002년 8월 6일 김유정문학촌을 설립했으며, 실레마을이 자리한 경춘선 신남역은 2004년 김유정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유정은 농촌과 도시에서 마주한 가난을 웃음과 슬픔이 공존하는 이야기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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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김유정 (소설가)」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김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