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새로운 사상을 만난 청년
정약전은 1758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천전이며, 손암·연경재·매심 등의 호를 사용했다. 어머니 윤소온은 해남 윤씨 집안 출신으로 윤덕열의 딸이었으며, 정약전은 정약현의 이복동생이자 정약종과 정약용의 형이었다.
소년 시절 서울에서 생활한 정약전은 이윤하·이승훈·김원성 등과 가까이 지내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후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권철신에게 배움을 이어갔다. 이벽과 이승훈을 비롯해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먼저 받아들인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서양 역수학을 알게 됐고, 천주교에도 마음을 두게 됐다.
1779년에는 권철신이 여주 주어사에서 연 강학회에 참여해 이벽 등과 천주교 교리를 토론했다. 1784년에는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이끌던 조선 초기 천주교 공동체에서 동생 정약종·정약용, 이벽 등과 종교 활동을 했다. 가성직제도 아래에서 사제 역할도 맡았지만, 정약전 자신은 베이징에서 세례받을 생각으로 당시 세례를 받지 않았다. 이들의 활동은 1785년 4월 형조에 적발됐으며, 김범우를 제외한 교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관직 진출과 신유사옥
정약전은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고, 1790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이후 전적과 병조좌랑을 지냈다. 179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추진된 《영남인물고》 편찬에 참여했다.
1801년 신유사옥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을 때 정약전도 동생 정약용과 함께 화를 입었다. 정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보내졌고, 정약전은 신지도에 유배된 뒤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흑산도로 옮겨졌다. 그는 끝내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했으며, 1816년 6월 30일 내흑산 우이도에서 사망했다.
흑산도에서 완성한 《자산어보》
정약전은 유배지에 복성재라는 서당을 세워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저술 활동도 계속해 《자산어보》와 《송정사의》를 남겼으며, 《논어난》과 《동역》 등도 저술했다. 어물 장수 문순득의 표류 경험을 다룬 《표해시말》도 그의 저서로 전한다.
대표작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직접 조사하고 채집한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정약전은 조사 대상을 어류·패류·조류와 해금·충수류 등으로 나눴다. 각 생물의 이름과 분포뿐 아니라 생김새, 습성, 이용 방법까지 자세하게 기록했다. 《송정사의》에서는 조선 조정이 시행하던 소나무 관련 정책을 비판했다.
관찰과 기록으로 남은 이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자산어보》를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으로 평가한다. 이 책은 흑산도 바다의 생물을 실제 조사와 채집을 통해 분류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정약전의 학문적 성취를 보여준다. 문관이자 실학자·저술가·생물학자로 활동한 그는 유배지에서도 교육과 연구를 이어갔고, 16년의 유배 생활 끝에 생을 마쳤다.
정약전은 오늘날에도 흑산도 연해의 생태를 세밀하게 살펴 《자산어보》로 남긴 학자로 기억된다. 그의 생애와 저술은 드라마 《소설 목민심서》, 김훈의 소설 《흑산》, 2021년 영화 《자산어보》에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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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정약전」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정약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